1. 판결문은 재산이 있을 때만 돈이 된다

2026년 1월, 대법원 1부(주심 마용주 대법관)는 베타랩스가 싸이월드제트를 상대로 낸 계약자 지위 확인 및 부당이득 반환 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승소 원심을 확정했다. 피고 측의 동시이행항변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지급받은 가상자산에 대한 원상회복과 가액 반환 의무가 인정됐다. 금액은 약 137억 원, 2022년 제소 이후 4년이 걸렸다(서울신문 보도).

나는 이 소송의 원고 대표다. 그리고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승소를 알리기 위해서가 아니다. 대법원 확정판결을 받고도 돈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같은 해 스타트업 생태계를 흔든 두 개의 판결이 있었다. OGQ의 신철호 대표는 회사가 받은 90억 원 투자금이 법인 계좌에 그대로 있는데도 연 12% 이자가 붙은 약 120억 원을 개인 채무로 떠안았다. 어반베이스의 하진우 전 대표는 5억 원 투자 계약에 서명했다가 연복리 15%가 붙은 13억 원의 개인 빚을 졌고, 4월 대법원은 상고를 기각했다. 두 사건에서 법원의 논리는 같았다. "계약 문언이 명확하다."

세 사건을 나란히 놓으면 불편한 대칭이 보인다. 성실했던 창업자에게 계약 문언은 곧바로 집행이 됐다. 반면 처음부터 갚을 생각이 없었던 상대에게 계약 문언은 4년을 싸워 이겨도 여전히 종이 상태로 남아 있다.

계약서는 상대가 잃을 것이 있을 때만 작동한다. 이 글의 요지는 이 한 문장이다.


2. 우리가 넣은 돈의 구조

먼저 무엇을 어떤 형식으로 넣었는지 밝힌다(필자 진술 기준).

구분 계약 형식 규모 회수 관련 장치
지분 투자 RCPS(상환전환우선주) 25억 원 상환권, 전환권, 이해관계인 조항
대여 금전소비대차 2억 원 채권, 기한이익 상실
사업권 토큰 발행 계약 10억 원 독점 사업권, 계약 해제권
자산 이전 가상자산 지급 137억 원 상당 원상회복·가액 반환

계약서 관점에서 이 구조는 교과서적이다. RCPS 상환권으로 하방을 막고, 대여 채권으로 순위를 확보하고, 사업권 계약에 해제권을 걸고, 이해관계인 조항까지 넣었다. VC 실무가 권장하는 안전장치는 사실상 다 넣은 셈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결과는 지금까지 참담했다.

계약상 안전장치 설계 의도 실제 결과
RCPS 상환권 회사에 원금 상환 청구 배당가능이익 없음, 회사 자산 이미 유출
이해관계인 조항 지배주주 개인 책임 추궁 개인 재산 부재·은닉 시 무의미
사업권 계약 해제 원상회복 이전받은 자산이 제3자에게 처분됨
부당이득 반환 확정판결 강제집행 집행 대상 재산 추적에 별도 절차 필요

법원은 우리 손을 들어줬다. 계약은 유효했고 반환 의무도 인정됐다. 그러나 판결문은 집행 대상 재산이 존재할 때만 돈이 된다. 이 당연한 명제를 나는 4년을 들여 다시 배웠다.


3. 무엇이 문제였나?

싸이월드제트의 핵심 자산인 도메인과 사업권은 현재 서울중앙지방법원의 가압류 결정을 받은 상태다. 베타랩스가 신청했고, 사유는 정당한 주주총회 결의 없이 핵심 자산이 제3자에게 양도됐다는 판단이었다.

이 대목이 사건의 성격을 보여준다. 베타랩스는 싸이월드제트 지분 15.28%를 보유한 주요 주주였는데 주주총회 소집 통지를 받지 못했다. 최대주주였던 코스닥 상장사 인트로메딕 역시 통지를 받지 못한 것으로 확인됐다(코인리더스 보도). 지분 구조상 최대주주와 2대 주주가 모두 모르는 사이에 회사의 핵심 자산이 이전됐다는 뜻이다.

민사 재판 과정에서는 싸이월드제트의 특수관계인과 임직원들이 투자받은 가상자산을 임의로 매각한 뒤 약 137억 원을 개인 명의 계좌로 인출해 사적으로 사용한 정황이 확보됐다. 관련자들은 횡령·배임 혐의로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 고소됐고 수사가 진행 중이다. 유죄가 확정된 사안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히 해둔다.

내가 파악한 자금의 종착지는 지배주주 본인의 배우자와 처남을 포함한 특수관계인이다. 싸이월드 복원에 쓰기로 한 자산이 저가 매각 계약을 거쳐 특수관계인에게 넘어갔고 회사에는 손실만 남았다는 것이 우리 측 주장이며, 현재 수사 대상이다.

그리고 상대는 지금 소재가 확인되지 않는다. 나는 그가 코스닥 상장사 씨그널엔터 주가 조작과 횡령을 포함해 복수의 상장사 횡령 및 사기 전과를 가진 인물이라고 파악하고 있다.

여기서 나오는 결론은 냉정하다. 도주 중이고 법기술에 능한 상대 앞에서, RCPS든 이해관계인 조항이든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


4. 계약서의 역선택

OGQ와 어반베이스 사건에서 계약서는 잔인할 정도로 잘 작동했다. 이유는 단순하다. 그 창업자들에게는 잃을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개인 재산이 있었고, 도망갈 생각이 없었고, 법정에 출석했고, 판결에 따랐다.

투자계약의 이해관계인 조항, 연대책임 조항, 복리 이자 조항은 모두 악의적 창업자를 막기 위해 설계된 장치다. 그런데 적용 결과는 정반대다.

항목 성실한 창업자 악의적 지배주주
조항 협상력 낮음. 마감 직전 서명 높음. 조항 설계에 개입
판결 후 집행 즉시 개인 재산 압류 재산 은닉·특수관계인 이전
실질 부담 개인 파산 사실상 없음
시간 투자자에게 유리 4년 이상 지연, 도주

OGQ 사건의 계약서에는 "투자대상기업 및/또는 이해관계인"이라는 표현이 있었다. 법원은 "및/또는"이라는 병렬 주어가 조항 전체에 걸린다고 판단했다. 연대보증이라는 표현은 없었지만 상환 책임은 인정됐다. 어반베이스 사건에서는 회사에 회생절차가 개시되면 투자자가 회사 또는 대표이사 개인을 선택해 주식매수를 청구할 수 있게 돼 있었고, 대표의 귀책사유는 없었다.

내 사건의 계약서에도 이해관계인 조항은 있었다. 차이는 하나뿐이다. 상대가 그 조항을 무력화하는 방법을 나보다 잘 알고 있었다는 것.정부는 창업 실패가 개인 파산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창업자 연대보증을 단계적으로 폐지해 왔고, 2023년부터는 벤처투자계약에서 이해관계인의 연대책임을 금지하는 규정도 시행했다. 그러나 이 규정은 벤처투자조합에만 적용되고 캐피탈 계열 투자자에게는 미치지 않으며, '연대보증' 대신 '이해관계인'이라는 우회 표현을 쓰면 그대로 통과된다. 결과적으로 규제는선의의 창업자만 걸러내고 악의적 행위자는 통과시키는 필터가 됐다.

이것이 계약서의 역선택이다. 지키는 사람에게만 무겁고, 안 지키는 사람에게는 가볍다.


5. 왜 이 경험이 위험한가?

이 사건을 겪은 뒤 투자 검토서를 읽는 방식이 달라졌다. 예전에는 팀과 시장과 제품을 봤다. 지금은 먼저 이것을 본다.

  • 지배주주와 특수관계인의 과거 법적 분쟁 이력
  • 핵심 자산의 소유 명의와 이전 가능성
  • 주주총회 소집 통지가 실제로 이뤄지는 회사인지
  • 패소 시가 아니라 승소 시 집행 가능한 재산이 남아 있을 구조인지

합리적인 실사 항목처럼 보이지만, 나는 이것이 투자 위축의 시작이라는 것을 안다. 이 필터를 통과할 초기 스타트업은 거의 없다. 창업 3년 차 팀에게 "집행 가능한 재산"을 요구하는 순간, 그것은 투자가 아니라 담보 대출이다.

한국 벤처 생태계에서 반복되는 악순환은 다음과 같다.

  1. 악의적 행위자가 계약을 무력화한다
  2. 투자자가 손실을 입고 계약서를 더 강하게 조인다
  3. 강화된 조항은 협상력이 없는 성실한 창업자에게 먼저 적용된다
  4. 성실한 창업자가 실패했을 때 개인 파산에 이른다
  5. 창업 기피와 투자 기피가 동시에 심화된다

시스템을 악용하는 소수 때문에, 그리고 창업자를 보호한다면서 구멍을 남긴 규제 때문에, 결국 멀쩡하게 사업한 사람들이 피해를 보는 구조가 고착된다. 나는 지금 그 순환의 한 지점에 서 있고, 여기서 내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가 다음 사이클에 영향을 준다는 것도 안다.


6. 서명 전에 확인해야 할 것들

2026년의 판례들과 내 경험이 남긴 실무 교훈을 정리한다. 창업자와 투자자 양쪽 모두에게 해당된다.

① 금전 조항의 주어를 확인하라.누가 돈을 갚는 조항인지 주어부터 본다. '회사 및/또는 이해관계인'이라는 표현은 개인 책임을 의미한다.② 이해관계인의 의무 범위를 협상하라.주식 처분 제한, 의결권 행사 같은 행위 의무로 한정하고 금전적 책임은 원칙적으로 배제한다.③ 풋옵션의 행사 사유와 가격을 통제하라.회생·경영 악화 같은 회사 사유를 제외하고, 복리 이자는 단리로 조정한다.④ 마감 직전 추가 조항에 즉답하지 마라.구두 약속과 메신저 대화는 법정에서 배척된다. 수정 요구와 회신을 서면으로 남긴 뒤 서명한다.⑤ 투자자 유형을 확인하라.신기술사업투자조합, 캐피탈 계열이면 벤처투자법의 보호가 없다.⑥ 투자자는 상대의 과거를 실사하라.내가 하지 못했던 것이다. 사업계획서와 팀은 봤지만 지배주주의 전력과 특수관계인 구조는 보지 않았다. 계약서를 아무리 잘 써도 이 실사를 건너뛰면 소용이 없다.⑦ 판결과 회수는 다른 문제다. 계약서를 검토할 때 "이 조항이 유효한가"만 묻지 말고 "승소했을 때 무엇을 집행할 수 있는가"를 함께 물어야 한다. 이 질문을 하지 않으면 4년 뒤에 하게 된다.


7. 맺으며 - 그럼에도, 실패한 창업자에게

우리 사건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대법원 확정판결을 집행권원으로 삼아 강제집행, 채권 추심, 사해행위 취소 소송을 순차적으로 진행하고 있고, 형사 재판에서 범죄수익이 확인되면 몰수·추징보전 절차도 추진할 계획이다. 분쟁 자산을 기반으로 한 싸이월드·도토리 관련 신규 코인 사업에 대해서도 시장에 주의를 당부했다. 같은 자산 위에서 선의의 투자자가 다시 피해를 입는 일은 막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 싸움은 끝까지 간다. 고의로 남의 돈을 빼돌린 사람에 대해서는 계약과 법이 허용하는 모든 수단을 쓸 생각이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분명히 해두고 싶은 것이 있다.

내가 겪은 일은 사기 사건이지 투자 실패가 아니다. 이 둘을 섞는 순간 생태계가 망가진다. 배임과 횡령에 적용해야 할 잣대를, 정직하게 시도했다가 시장에서 진 팀에게 들이대면 안 된다.

계약서의 가혹한 조항들은 원래 악의를 막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지 실패를 처벌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런데 지금 한국에서는 그 조항들이 정확히 반대로 쓰이고 있다. 도망간 사람은 잡지 못하고, 남아서 책임지려는 사람만 개인 파산으로 몰아간다.

스타트업의 실패율은 원래 높다. 그것을 알고 들어가는 것이 벤처투자다. 창업자가 회사 돈을 빼돌리지 않았고, 계약을 지켰고, 마지막까지 구성원의 급여와 퇴직금을 챙기려 애썼다면, 그 실패는 창업자 개인의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감수하기로 합의한 위험이다.

정상적으로 스타트업을 하다가 망한 경우, 투자자는 스타트업 구성원을 배려할 의무가 있다. 그것이 실패를 감수하고 자본을 받은 쪽과 실패를 예상하고 자본을 낸 쪽 사이에서, 계약서에는 적혀 있지 않지만 지켜져야 할 유일한 조항이다.


본 글의 소송 경과는 2026년 2월 19일 서울신문, 2026년 7월 10일 코인리더스 보도 및 대법원 확정판결에 기초한다. 형사 사건 관련 내용은 현재 수사가 진행 중인 혐의 사실이며 유죄가 확정된 사안이 아니다. 필자는 해당 소송의 원고 당사자로, 이 글은 일방 당사자의 관점을 담고 있다.

본 글은 정보 제공 목적이며 투자 권유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