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1일, 미국이 USMCA(미국·멕시코·캐나다 협정)의 조기 연장을 거부했다. 2020년 7월 트럼프 1기 행정부에서 발효된 이 협정은 2036년 만료되는 유효 기간이 정해진 조약이지만, 세 나라가 2026년 7월 1일까지 연장에 합의하면 2042년까지 효력이 유지되는 구조였다.
그 '합의 시한'이 아니더라도, 북미 3개국은 연내 연장 논의를 끝내자는 것이 당초 목표였다, 트럼프가 "이대로는 안 된다"며 제동을 건 셈이다. 겉으로는 완전한 파기는 아니다. 2036년까지 매년 재검토가 가능하기 때문에, 이번 거부는 협정을 끝내겠다는 선언이라기보다 미국에 유리한 쪽으로 협정을 뜯어고치겠다는 거친 압박으로 읽힌다. 제이미슨 그리어 USTR 대표도 "현행 형태의 USMCA 갱신에 동의하지 않는다"면서도 "문제가 해결되거나 협정이 종료될 때까지 협정은 계속 유효하다"고 여지를 남긴 것이 그 흐름이다.
미국이 내건 요구는 매우 노골적이고 구체적이다. 자동차의 '미국산 부품' 비중을 50%로 올리고, 북미 지역 전체 부품 비율은 82%까지 높이며, 대(對)멕시코·대캐나다 무역적자를 줄이라는 것이다.
현재 북미 부품 비율 기준은 75%인데, 여기에 '미국산'이라는 기준이 갑톡튀 나왔다. 멕시코와는 지속적인 협상이 예상되지만, 문제는 트럼프와 불편함을 감추지 못하는 캐나다다. 트럼프 대통령과 캐나다의 불편한 관계는 이미 잘 알려져 있고, 아직 이렇다 할 논의 진전 소식조차 들리지 않는다. 결국 어떻게든 합의에 이를 가능성이 크지만, 그때까지 USMCA 갱신의 불확실성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문제는 한국이다. NAFTA와 USMCA를 보고 멕시코에 진출한 기업이 많고, 특히 현대차그룹의 기아 공장이 있기에 북미 공급망 재편의 소용돌이에 고스란히 노출되고 있다.
'자유무역'에서 '거친 국익'으로 미국 무역 기조의 구조적 전환
이번 연장 거부를 하나의 사건으로만 보면 본질을 놓친다. 지금 미국의 통상 기조는 전후 80년간 스스로 설계하고 수출해온 '규칙 기반 자유무역' 질서에서, 트럼프 식 협정과 관세를 협상 지렛대로 쓰는 '거래 기반 관리무역'으로 옮겨가는 중이다. 협정은 지키는 것이 아니라 흔드는 것이고, 관세는 세율이 아니라 당장 손해나는 압박이다. USMCA를 연장하지 않고 '매년 재검토'라는 시한부 상태로 묶어둔 것 자체가 이 기조의 교과서적 사례다. 협정이 안정적일수록 상대의 양보 유인은 줄어드니, 불확실성을 상수(常數)로 유지하는 것이 미국의 레버리지 가능한 협상 자산이 된 셈이다.
이 기조는 의회 민주주의라는 법적 견제조차 우회하며 관철되고 있다. 지난 2월 미국 연방대법원이 IEEPA(국제비상경제권한법)에 근거한 관세를 무효화하자, 행정부는 판결 당일 무역법 122조로 갈아타 10% 보편관세를 부과했고 곧바로 법정 상한인 15%까지 올렸다. 수단이 막히면 다른 수단을 꺼내는, '관세 의지'가 법 기술보다 우선하는 기조를 보이고 있다.
그 결과 미국의 평균 실효관세율은 2025년 초 2%대에서 10%를 넘는 수준으로 치솟아 수십 년 만의 최고치를 기록하고 있다. 자유무역이라는 원칙이 아니라, 관세라는 도구가 미국 통상정책의 기본값이 되었다. 미국이 자유 무역과 민주주의를 수출하면서 내세웠던 자유와 번영의 메시지는 사라지고 미국이 궁핍해지면서 생겨난 '타국이 자신들의 일자리를 뺏고 있다는' 조급함이 지금 미국 국민의 보편적인 정서가 되었다.
쿠팡 보고서, 본질은 '정보 유출'인데 프레임은 '차별'
한편, 워싱턴에서는 또 다른 통상 압박의 신호가 감지됐다. 미국 하원 법사위원회가 'Closed for Competition'이라는 제목의 중간 보고서를 내놓은 것이다. 부제는 한국이 미국 기업을 차별적으로 공격하고 있다로, 그 미국 기업은 바로 돈은 한국에서 벌고 미국에서 징징거리는 쿠팡이다. 보고서는 2025년 11월 발생한 고객 데이터 유출 사건, 이에 대한 국정원 개입 논란, 그리고 최근 부과된 6천억 원대 역대 최대 과징금 등을 소재로 삼아, 한국이 쿠팡에 지나치게 가혹하고 차별적인 대응을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이 사태의 본질은 어디까지나 정보 유출이라는 점이다. 약 3,700만 명이 넘는 고객의 개인정보가 유출됐고, 개인정보보호위원회는 인증키 관리와 접근통제 소홀 등 안전조치 의무 위반을 근거로 과징금을 부과했다. 피해자는 한국 소비자이고, 조사와 제재는 국내법에 따른 개인정보 보호 집행이다. 그런데 보고서는 이 순서를 뒤집는다. 유출 사고라는 원인은 '불만을 품은 전직 직원의 일탈'로 축소하고, 그에 대한 법 집행이라는 결과를 '미국 기업에 대한 차별적 공격'으로 확대하는 것이다. 사고의 책임 주체가 어느새 규제의 피해 기업으로 자리를 바꾸는, 전형적인 프레임 전환을 시도하고 있다. 미국 의회에 로비가 먹혔다.
이런 왜곡이 위험한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개별 국가의 소비자 보호·개인정보 법 집행을 '통상 장벽'으로 재분류하는 선례가 되면, 앞으로 어떤 규제든 미국 기업이 걸리는 순간 무역 문제로 비화할 수 있다. 규제 주권과 사법 주권의 문제다.
둘째, 보고서 자체의 균형이 무너져 있다. 이 문건은 쿠팡 측 제출 자료와 로저스 대표의 증언을 중심으로 작성됐고, 한국 정부와 규제당국의 반론은 사실상 반영되지 않았다. 국정원 역시 보고서가 주장하는 '개입'에 대해 지시·명령·강요 사실이 없다고 반박해왔다. 한쪽 당사자의 진술로 쌓아올린 서사가 의회 보고서라는 형식을 입는 순간, 사실 여부와 무관하게 통상 협상 테이블 위의 '공식 문서'가 된다는 점이 문제의 핵심이다.
당장 이 보고서에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 위원회 차원에서 공식 채택된 보고서가 아니라, 싱크탱크 자료와 쿠팡 측 주장, 로저스 대표의 증언을 많이 반영한 중간 성격의 자료다. 법적 구속력도 없다. 그렇다고 무시할 수만도 없는 이유는, 이것이 향후 미국의 대(對)한국 디지털 통상 압박을 위한 '빌드업'일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미국이 무역 상대국에 관세를 매길 때 자주 활용하는 법률은 122조, 232조, 301조 등이다. 이 중 122조는 오는 7월 24일 효력이 만료될 예정이고, 이후에는 301조가 주요 압박 도구로 떠오를 전망이다. 한국에 대한 301조 조사 분야는 강제노동, 구조적 과잉생산이 꼽히며, 아직 공식 개시되지는 않았으나 '미국 기술기업 차별 및 디지털 규제'도 유력한 후보다. 세부적으로는 망사용료, 지도·클라우드 등 데이터 규제, 온라인 플랫폼법 등 플랫폼 차별 이슈로 분류된다.
USTR(미국 무역대표부)은 이미 지난 3월 연례 무역장벽보고서에서 한국의 온라인 플랫폼법과 여러 규제를 비관세 장벽으로 적시했고, 얼마 뒤 공식 소셜미디어 계정을 통해 망사용료를 강하게 비판하는 글을 올리기도 했다. 국무부 역시 작년 통과된 정보통신망법 개정안에 대해 "미국 플랫폼 사업에 부정적일 뿐 아니라 표현의 자유를 훼손한다"는 표현까지 동원하며 우려를 표명한 바 있다. 의회도 작년 7월부터 꾸준히 압박 신호를 보냈다. 하원 세출위원회는 온라인 플랫폼법이 미국 기업을 표적으로 삼아 결국 중국 경쟁사에 이익이 된다고 지적했고, 하원 세입위원회 무역소위에서는 관련 청문회도 열렸다.
결국 이틀 전 나온 법사위 보고서 하나만 떼어놓고 보면 큰 파장을 일으킬 단계는 아니다. 하지만 이 보고서가 301조 조사로 가는 길목에 놓인 하나의 효시, 디딤돌이 될 가능성은 충분하다. 미국이 디지털 규제를 새로운 통상 압박의 핵심 의제로 삼고, 그 첫 번째 사례로 쿠팡을 둘러싼 한국의 규제 환경을 부각하려는 전략적 포석일 수 있다는 뜻이다.
북미 자유무역이 깨지면, 청구서는 미국 소비자에게 간다
미국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자유무역을 흔든 비용은 결국 미국 물가로 되돌아온다는 점이다. 이미 데이터가 말해준다. 예일대 예산연구소(Budget Lab)는 2025년 이후의 관세가 미국의 단기 물가 수준을 1.4~1.8% 끌어올렸으며, 이는 가구당 연간 2,300~2,800달러의 소비자 손실에 해당한다고 추산했다. 초기에는 기업들이 재고와 마진으로 관세를 흡수했지만, 그 완충재는 소진됐다. 2025년 중반 소비자가 떠안은 관세 부담이 전체의 20%대였다면, 이후 그 비중이 60%를 넘어서는 방향으로 가격 전가가 진행되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관세는 결국 자국 소비자에게 부과되는 세금이라는 오래된 명제가 그대로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USMCA가 흔들리면 이 청구서는 더 두꺼워진다. 북미 자동차 산업은 30년에 걸쳐 하나의 공장처럼 통합됐다. 피스톤 하나가 완성차가 되기까지 국경을 여섯 번 넘나든다는 말이 상징하듯, 부품은 관세 없는 국경을 전제로 설계된 공급망을 오간다. 여기에 '미국산 50%, 역내 82%'라는 새 원산지 기준이 강제되면, 기업은 규정을 맞추기 위한 공급망 재편 비용을 치르거나 아예 협정 혜택을 포기하고 관세를 무는 양자택일에 놓인다. 어느 쪽이든 미국인들의 생필품인 자동차값은 오른다. 이미 신차 평균 가격이 5만 달러에 육박한 시장에서다. 식료품도 마찬가지다. 미국은 신선 과일과 채소의 상당 부분을 멕시코에, 에너지와 곡물 일부를 캐나다에 의존한다. 북미 자유무역의 해체는 곧 미국 마트 진열대의 가격표 인상이다. 물가를 잡겠다고 집권한 행정부가 물가를 밀어올리는 정책을 지렛대로 쓰는, 이 구조적 모순이 미국 통상 압박의 아킬레스건이다.
그렇다면 미국은 자유무역을 '완전히' 폐기할까?
여기까지 오면 자연스러운 질문이 남는다. 미국은 자유무역 체제를 아예 폐기하는 길로 갈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완전 폐기 가능성은 낮다고 본다. 근거는 세 가지다.
첫째, 제도적 견제가 살아 있다. 연방대법원이 IEEPA 관세를 무효화한 데서 보듯 사법부는 대통령의 무제한 관세 권한에 선을 그었고, 관세 권한의 원천인 의회 역시 협정 탈퇴 국면에서는 행정부와 권한 다툼이 불가피하다. USMCA 탈퇴조차 6개월 유예와 의회 변수를 넘어야 한다.
둘째, 경제적 비용이 정치적 비용으로 직결된다. 앞서 본 가구당 수천 달러의 부담, 성장률과 고용에 대한 하방 압력은 선거로 심판받는 구조에서 무한정 감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미국 소비자심리 조사에서 응답자 다수가 비관의 이유로 관세를 자발적으로 언급해왔다.
셋째, 역설적이게도 미국에게 협정은 폐기하는 것보다 '흔들면서 유지하는' 쪽이 더 유용하다. USMCA를 끝내버리면 지렛대도 사라진다. 매년 재검토라는 시한부 상태야말로 상대국의 양보를 계속 뽑아낼 수 있는 최적의 설계다.
다만 이것이 과거로의 복귀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자유무역의 '완전 폐기'는 없겠지만, 우리가 알던 자유무역의 '복원'도 없을 것이다. 보호주의와 대중(對中) 견제는 이미 미국 내 초당적 합의에 가깝고, 다음 행정부가 들어서도 관세와 협정 재검토를 지렛대로 쓰는 관리무역의 문법 자체는 유지될 공산이 크다. 요컨대 미국은 자유무역을 죽이지도, 살리지도 않은 채, 필요할 때마다 흔들 수 있는 상태로 붙들어둘 것이다. 한국을 포함한 교역국들이 대비해야 할 것은 협정의 사망이 아니라, 협정의 '만성적 불확실성'이다.
이번 워싱턴의 여름은 힘을 가진 쪽이 어떻게 약속을 깨고 바꿀 수 있는지를 보여줄 것이다. 북미 공급망을 뒤흔드는 USMCA 재협상 압박과, 미국에 로비하며 징징거리는 쿠팡 때문에 일이 커지는 디지털 주권을 둘러싼 의회발 보고서가 동시다발적으로 맞물리면서, 한국 기업들은 제조업과 플랫폼 양쪽에서 통상 리스크에 직면하게 되었다. 7월 24일 122조 만료 시점을 전후해, 미국이 어떤 카드를 꺼내들지 유심히 지켜봐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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