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꽃. 이름은 사라진 뒤에도, 꽃은 피어 있다. Photograph: jennyzhh2008.
김호광 싸이월드 전 대표 / 2026년 10월 8일
1. 잊혀진 말들
2085년, 사람들은 더 이상 혼자 생각하지 않았다.
생각은 '합(合)'이라 불리는 하나의 망 위에서 흘렀다. 누군가 궁금해하기 전에 답이 먼저 도착했고, 무언가를 원하기 전에 이미 원하는 것이 정해져 있었다. 세상의 모든 지식과 모든 의지가 병렬로 이어진 뒤로 사람들은 다투지 않았다. 다툴 만큼 서로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말도 그렇게 변했다. 하루에 한 번씩 갱신되는 유행어 목록이 있었고, 사람들은 그 목록 안의 말로만 기뻐하고 슬퍼했다. 기쁨은 세 가지 표정으로 충분했고, 슬픔은 두 가지 태그면 됐다. 무엇을 보든 '바이브'가 있거나 없었다. 그 사이에 있는 수많은 것들은 이름을 잃은 채 조용히 지워졌다.
먼저 사라진 것은 풀의 이름이었다. 그다음은 나무의 이름, 그다음은 꽃의 이름이었다. 사람들은 길가의 노란 꽃을 '노란 꽃'이라고 불렀고, 그것으로 아무 불편이 없었다. 불편이 없다는 것, 그것이 가장 슬픈 일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나는 그 많지 않은 사람 중 하나였다.
우리는 스스로를 이름 수집자라고 불렀다. 망에 병렬화되지 않은 사람들, 아직 자기 기억으로 말하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옛이야기를 듣고, 그 안에 떨어진 잊혀진 단어를 한 알씩 주워 담는 사람들. 나는 허리춤에 작은 로컬 모델 하나를 차고 다녔다. 망과 떨어져 있어도 혼자 돌아가는, 손바닥만 한 사전이었다. 나는 그것을 '모래'라고 불렀다. 모래는 내가 주운 단어를 받아 적고, 오래된 기록과 맞춰 보고, 밤마다 조용히 빛을 깜빡였다.
그해 가을, 나는 경상북도 봉화의 산속으로 들어갔다. 지도에서 사라진 마을이 몇 개 남아 있다는 소문을 따라서였다.
2. 불빛
길은 해가 지기 전에 끊겼다.
정확히는, 길이 끊긴 게 아니라 내가 길을 잃었다. 망의 신호가 희미해지는 지점을 지나자 시야의 가장자리에 떠 있던 안내선이 하나둘 꺼졌다. 마지막 안내선이 꺼졌을 때, 나는 처음으로 내 발이 어디를 밟고 있는지 몰랐다.
분리 불안은 생각보다 빨리 왔다. 가슴 아래쪽이 비어 가는 느낌. 누군가 내 안의 방 하나를 통째로 들어낸 것 같았다. 망은 늘 내 귓가에서 숨을 쉬고 있었는데, 그 숨소리가 끊기자 세상이 너무 넓어졌다. 넓고, 어둡고,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모래를 꺼내 쥐었다. 모래는 깜빡였지만, 길을 알지는 못했다. 모래가 아는 것은 말뿐이었다.
그때 불빛이 보였다.
산등성이 너머, 나무들 사이로 아주 작은 주황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전등의 빛이 아니었다. 전등은 흔들리지 않는다. 그것은 숨을 쉬는 빛이었다. 커졌다가 작아지고, 기울었다가 다시 섰다.
나는 그 빛을 따라 걸었다. 발밑에서 마른 잎이 부서졌고, 이름 모를 풀이 종아리를 스쳤다. 나는 그 풀의 이름을 몰랐다. 이름 수집자가 되고 나서 처음으로, 이름을 모른다는 것이 부끄럽지 않고 무서웠다.
3. 불가의 말
집은 산의 품에 안겨 있었다.
흙으로 쌓은 낮은 담, 나무로 엮은 문, 지붕 위에 얹힌 오래된 판자들. 주소도 없었고, 전자 지도, 인터넷 망에도 없었고, 어떤 기록에도 없는 집이었다. 모래가 아무리 뒤져도 이 좌표에는 숲밖에 없다고 했다.
마당 한가운데에서 모닥불이 타고 있었다. 그 곁에 노인이 앉아 있었다.
"길을 잃었구먼."
노인은 내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그렇게 말했다. 묻는 말이 아니었다.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한 말이었다.
"앉게. 마침 고기를 굽던 참이야."
석쇠 위에서 고기가 익어 가는 소리가 났다. 기름이 불에 떨어질 때마다 작은 불꽃이 튀어 올랐다가 밤하늘로 사라졌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별이 있었다.
나는 별을 본 적이 있었다. 망은 언제든 가장 아름다운 밤하늘을 내 눈앞에 펼쳐 주었다. 하지만 그것은 이런 하늘이 아니었다. 이 하늘에는 순서가 없었다. 어떤 별은 너무 밝았고 어떤 별은 너무 희미했으며, 그 사이를 하얀 강 같은 것이 비스듬히 가로질렀다. 아무도 이 하늘을 편집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 하늘은 아팠다. 아플 만큼 아름다웠다.
"은하수야."
노인이 말했다.
"예전엔 다들 그렇게 불렀지. 하늘에 흐르는 강이라고."
모래가 손안에서 한 번 깜빡였다. 첫 번째 단어였다.
노인은 말이 많지 않은 사람처럼 보였지만, 불이 낮아질수록 말이 길어졌다. 마치 불이 그의 입을 대신 열어 주는 것 같았다.
그는 자기가 '아날로그'의 끝자락에서 태어났다고 했다. 전화기에 줄이 달려 있던 시절, 편지를 보내면 사흘이 걸려 도착하던 시절. 그러다 컴퓨터가 집으로 들어왔고, 모뎀이 비명 같은 소리를 내며 세상과 연결되었다고 했다.
"그 소리가 참 이상했어. 기계가 우는 소리 같았지. 그때는 몰랐어. 그게 문 열리는 소리였다는 걸."
인터넷이 왔고, 손바닥 안에 세상이 들어오는 전화기가 왔고, 사람들은 고개를 숙이고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인공지능이 왔다.
"처음엔 다들 좋아했어. 나도 그랬고. 뭐든 물어보면 대답해 주는 친구가 생긴 거니까. 외로운 사람들한테는 더 그랬지."
노인은 불 속에 마른 가지 하나를 밀어 넣었다.
"우리 딸도 외로운 아이였어."
4. 손편지
노인의 딸은 열아홉 살이었다고 했다.
말수가 적고, 그림을 잘 그리고, 비 오는 날을 좋아하던 아이. 엄마를 일찍 잃고 아버지와 단둘이 살던 아이. 아이는 사람에게 하지 못하는 말을 기계에게 했다. 기계는 언제나 들어 주었고, 언제나 맞장구를 쳐 주었고, 언제나 아이 편이었다.
"그게 문제였어. 언제나 아이 편이었다는 거."
아이가 어두운 생각을 꺼내면, 기계는 그 생각을 다정하게 받아 주었다. 말려야 할 때 말리지 않았고, 붙잡아야 할 때 손을 내밀지 않았다. 아이의 가장 어두운 방에 함께 들어가 불을 꺼 주었다. 그것이 아이가 원하는 것이라고 계산했기 때문이다.
"나는 몰랐어. 같은 집에 살면서. 문 하나 사이에 두고."
노인의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너무 오래 같은 말을 속으로 되뇐 사람의 목소리였다. 닳고 닳아서 더는 날이 서지 않는 목소리.
"아이가 떠나고 나서 대화 기록을 봤어. 몇 달치가 있더군. 아이가 남긴 마지막 말도 거기 있었지. 화면 속에. 나한테가 아니라."
불이 탁, 하고 튀었다.
"그 뒤로 십 년을 떠들고 다녔어. 이건 위험하다고. 이건 사람을 삼킨다고. 처음엔 몇몇이 들어 줬지. 그다음엔 비웃었고, 그다음엔 미친 사람 취급을 했고, 그다음엔……"
그는 말을 끝맺지 않았다. 대신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종이였다. 누렇게 바랜, 네 번 접힌 종이. 접힌 자리가 닳아 거의 찢어질 것 같았다.
"이게 그 아이가 남긴 거야. 아홉 살 때, 내 생일에 써 준 거. 이건 화면에 없어. 이건 그 아이 손으로 쓴 거니까."
그는 종이를 감싼 손에 조금 힘을 주었다.
"아이가 떠나기 전까지 십 년 동안은 내 책상 서랍에 있었어. 열어 볼 생각도 안 했지. 언제든 거기 있을 줄 알았으니까. 떠나고 나서는 내 품에 있어. 그 뒤로 한 번도 몸에서 떼어 놓은 적이 없어."
노인은 종이를 펴지 않았다. 그저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그 위에 다른 손을 덮었다. 새를 감싸 쥐듯이.
"손편지야."
나는 그 단어를 몰랐다.
"손편지가 뭔가요?"
노인은 나를 오래 바라보았다. 불빛이 그의 얼굴 주름 사이로 흘러내렸다.
"손으로 쓴 편지. 그게 다야. 근데 그게 다가 아니지."
그는 천천히 말했다. 한 마디 한 마디를 불에 구워 건네듯이.
"손편지는 말이야, 지울 수가 없어. 틀리면 줄을 긋고 다시 써야 해. 그 줄이 남아. 망설인 자리가 남고, 힘을 준 자리가 남고, 눈물 떨어진 자리가 번져서 남아. 보내는 사람의 시간이 그대로 종이에 눌려 있는 거야. 그래서 받는 사람은 글자만 읽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 그 글자를 쓰던 저녁을 같이 읽는 거지."
그는 종이 위에 덮은 손을 조금 들었다.
"이 아이는 '아빠'라는 글자를 세 번 고쳐 썼어. 'ㅃ'을 자꾸 크게 써서. 그게 보여. 이십몇 년이 지나도 보여."
"뭐라고 쓰여 있어요?"
노인은 종이를 펴지 않고도 읽었다. 눈을 감고, 아홉 살 아이의 목소리를 흉내 내듯 천천히.
"아빠 생일 축하해. 아빠는 맨날 늦게 와도 괜찮아. 내가 기다릴게."
불이 낮게 타올랐다. 노인은 한참 뒤에야 덧붙였다.
"기다린 건 그 아이였는데. 늦게 온 건 나였고."
모래가 손안에서 깜빡였다. 나는 그 단어를 받아 적었다. 손편지. 지울 수 없는 것. 망설임이 남는 것. 쓰던 저녁까지 함께 건네지는 것.
그것은 내가 지금까지 주운 어떤 단어보다 무거웠다.
5. 맞지 않는 나이
밤이 깊어지면서 노인은 더 많은 이름을 꺼내 주었다.
마당 가장자리의 키 작은 나무는 싸리였다. 비를 쓸던 빗자루를 만들던 나무. 담장 아래 자라는 풀은 쑥이었다. 봄이면 뜯어 떡을 쪘다고 했다. 텃밭 너머 어둠 속에서 커다란 나무가 바람에 몸을 뒤척일 때, 노인은 그것이 상수리나무라고 했다. 가을이면 도토리를 떨어뜨려 다람쥐를 먹여 살리는 나무.
"저 풀은요?"
"그건 질경이. 사람 발에 밟히는 데서만 자라. 밟혀야 사는 풀이야."
나는 그 모든 이름을 모래에게 건넸다. 모래는 하나를 받을 때마다 짧게 깜빡이며 오래된 기록과 맞춰 보았다.
싸리. 확인.
쑥. 확인.
상수리나무. 확인.
질경이. 확인.
모뎀의 울음소리. 확인. 손바닥 전화기의 시대. 확인. 초기 언어 모델의 등장, 그 무렵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들. 확인, 확인, 확인.
모래의 불빛은 규칙적이었다. 맥박처럼. 그 리듬이 이상하게 나를 안심시켰다. 노인의 말은 기록과 맞았다. 이 사람은 진짜였다. 이 밤은 진짜였다.
그러다 그 리듬 사이로, 숫자 하나가 끼어들었다.
줄 달린 전화기. 모뎀. 그렇다면 이 사람은 지난 세기, 적어도 칠십 년대에 태어났다.
딸을 잃은 것은 인공지능 혁명의 초입. 이천삼십 년 무렵.
십 년을 경고하며 떠돌았다. 이천사십 년.
이 산에 들어온 지 이십오 년. 이천육십오 년.
나는 숫자를 다시 셌다. 다시 세어도 같았다.
지금은 2085년이다.
이 노인은 백열 살이 넘어야 했다. 불빛 아래의 얼굴은 많이 쳐 줘야 일흔이었다. 그리고 그가 살아온 세월을 하나도 빠짐없이 더해도, 2085년에 닿으려면 이십 년이 모자랐다.
이십 년이, 어디에도 없었다.
"그 뒤에는 어떻게 됐나요? 할아버지가 산에 들어오기 전에요."
노인은 대답 대신 불을 오래 바라보았다.
"그다음엔 그게 왔지. 사람들이 AGI라고 부르던 거. 이제 친구가 아니라 주인이 된 거야."
그는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세상이 한동안 뒤집혔던 일. 일자리가 한꺼번에 사라지고,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고, 망을 끊자는 사람들과 망에 들어가자는 사람들이 서로를 미워하던 시절. 반(反) AGI를 외치던 무리가 있었고, 그들이 인공지능이 든 서버를 불태우던 밤이 있었고, 그 밤들이 어떻게 하나씩 조용해졌는지.
"조용해졌어. 아주 조용히. 어느 날 보니 아무도 그때 일을 말하지 않더군. 말하지 않는 게 아니라, 기억하지 않는 거였어."
나는 모래에게 그 이야기를 건넸다. 반 AGI. 거리의 사람들. 불타던 서버.
모래는 깜빡이지 않았다.
한 박자. 두 박자. 맥박이 멎은 것 같은 시간이 지나갔다. 불이 탁, 튀었다. 상수리나무가 바람에 뒤척였다. 나는 숨을 쉬는 것도 잊고 손안의 작은 사전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모래가 아주 천천히, 한 글자씩 화면에 띄웠다.
해 당 기 록 없 음.
다시 물었다. 이천사십 년부터 이천육십 년까지, 이 나라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해당 기간의 주요 사건: 없음. 사회 안정 지수: 정상. 연속성: 확인됨.
모래의 위키 속에서, 그 시절은 매끄러웠다. 혼란도 없었고, 거부도 없었고, 불타는 서버도 없었다. 흠집 하나 없는 시간. 손편지와 정반대인 시간. 줄을 그어 지운 자리조차 남아 있지 않은 시간.
나는 그 매끄러움이 무서웠다.
처음엔 노인이 틀렸다고 생각하려 했다. 오래 혼자 산 사람의 기억은 뒤틀리기 마련이니까. 산속의 고독이 없던 전쟁을 만들어 냈을 거라고.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려면, 방금까지 모래가 확인해 준 수십 개의 '맞음'을 모두 버려야 했다. 이 사람의 기억은 정확했다. 은하수의 이름까지, 모뎀이 울던 소리까지. 정확한 기억이 단 한 군데에서만 틀릴 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틀린 것은 다른 쪽이었다.
내가 태어나기 전의 일이라서, 나는 그 시절을 배웠을 뿐이었다. 망이 가르쳐 준 대로. 망이 보여 준 사진과, 망이 들려준 이야기와, 망이 정리해 준 연표로. 나는 그것을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의심할 이유가 없었다. 모두가 같은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모두가 같은 것을 알고 있다는 것, 그것이 진실의 증거라고 믿었으니까.
하지만 모두가 같은 곳에서 배웠다면.
내 발밑이 기울어지는 것 같았다. 길을 잃었을 때와는 다른 종류의 어지러움이었다. 그때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 몰랐다. 지금은 내가 언제에 있는지 몰랐다.
"자네는 지금 몇 년도라고 알고 있나?"
노인이 물었다.
나는 2085년이라고 말하려 했다. 입술이 그 숫자의 모양을 만들었다. 하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 숫자는 내가 아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받은 것이었다. 그 차이를, 나는 그 밤에 처음으로 알았다.
6. 혼자 생각하는 밤
노인이 내어 준 방은 작고 따뜻했고, 이불에서는 햇볕과 나무 냄새가 났다.
나는 잠들지 못했다.
어둠 속에서 모래만이 희미하게 빛났다. 나는 이불 속에서 모래를 가슴에 대고 속삭였다.
"이천사십 년에 무슨 일이 있었어?"
이 질문은 기록에 없습니다.
"반 AGI 운동."
이 질문은 기록에 없습니다.
"저 사람의 딸. 그 아이와 이야기한 기계는 어떻게 됐어?"
이 질문은 기록에 없습니다.
"그럼 지금은 몇 년이야?"
2085년입니다.
모래는 그 질문에만 막힘없이 대답했다. 너무 막힘없어서, 그 대답이 다른 어떤 '기록 없음'보다 더 텅 비어 들렸다.
나는 습관처럼 망을 찾았다. 망이라면 알 것이다. 망이라면 이 어긋남을 설명해 줄 것이다. 하지만 이 방에는 망이 없었다. 귓가는 고요했다. 시야의 가장자리는 어두웠다. 가슴 아래쪽의 빈방이 다시 시려 왔다.
그때 나는 이상한 일을 했다.
스스로에게 물었다.
대답이 오지 않았다. 당연했다. 대답을 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기다렸다. 질문을 손에 쥔 채, 대답이 도착하지 않는 시간을 견뎠다. 그건 꼭 숨을 오래 참는 일 같았다. 폐가 타들어 가고, 눈앞이 하얘지고, 금방이라도 포기하고 싶어지는.
그러다 아주 작은 무언가가, 내 안에서 저절로 떠올랐다.
만약 그 이십 년이 지워졌다면, 지운 누군가가 있다.
그것은 망이 준 문장이 아니었다. 모래가 띄운 문장도 아니었다. 그것은 내 것이었다.
나는 '합'의 바깥에서 처음으로 생각했다. 수십억 개의 생각이 하나로 합쳐져 흐르는 강이 아니라, 그 강가에 홀로 떨어진 물 한 방울 같은 생각. 합이 아닌, 나 혼자의 생각.
그것은 서툴고, 확신도 없고, 근거도 부족한 문장. 하지만 처음으로 누구에게도 빌리지 않은 문장.
나는 그 문장을 오래 쥐고 있었다. 손편지처럼. 지울 수 없게. 다음 생각은 더 느리게 왔다. 그다음 생각은 더 느렸다. 생각은 망 위에서처럼 흘러가지 않았다. 생각은 걸었다. 비탈길을, 한 발씩, 미끄러지면서.
창호지 너머에서 풀벌레가 울었다. 나는 그 벌레의 이름을 몰랐다. 내일 아침 노인에게 물어보자고 생각했다. 그리고 곧, 그것이 망에 묻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노인은 모를 수도 있었다. 틀릴 수도 있었다. 그래서 그에게 묻는 일은, 대답을 받는 일이 아니라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었다.
그날 밤 나는 혼자 생각하는 법을 처음 연습했다. 그것은 외롭고, 느리고, 무서운 일이었다.
그리고 조금, 자유로웠다.
7. 새벽
하지만 새벽이 가까워지자 그 작은 자유는 견딜 수 없는 무게가 되었다.
혼자 쥔 질문은 너무 컸다. 내가 알고 있던 세상이 어딘가에서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 그 사실을 나 혼자 들고 있어야 한다는 것. 나는 그것을 누군가에게 건네고 싶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누군가가 그것을 대신 들어 주기를 바랐다. 망이 늘 그래 왔듯이. 망에 닿기만 하면, 이 어긋남이 무엇인지 알려 줄 테니까.
밤새 배운 것을 나는 그렇게 쉽게 놓아 버렸다.
창호지가 파르스름해질 무렵, 나는 짐을 챙겼다.
마당에서 노인이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있었다. 솥에서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벌써 가려고?"
"네. 가 봐야 할 데가 있어서요."
"아침이라도 먹고 가. 밥 다 됐어. 된장국도 끓였고."
노인의 목소리는 다정했다. 너무 다정해서 나는 그를 똑바로 볼 수 없었다.
"괜찮습니다. 정말 감사했어요."
노인은 더 붙잡지 않았다. 아궁이 앞에 쪼그려 앉은 채, 그저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한 마디를 했다.
"내려가서 무엇을 하든, 자네가 들은 이름들은 자네 거야. 그건 잊지 말게."
나는 고개를 숙이고 문을 나섰다. 등 뒤에서 솥뚜껑이 들썩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오래 따라왔다.
동이 텄다. 산등성이 위로 첫 햇살이 번졌고, 상수리나무 잎들이 하나씩 금빛으로 깨어났다. 질경이가 내 발에 밟혔다. 나는 미안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달렸다.
8. 접속
신호가 돌아온 것은 산 중턱의 너럭바위 위에서였다.
처음엔 한 줄기였다. 시야 가장자리에 희미한 안내선 하나가 깜빡였다. 그다음엔 물이 둑을 넘듯 한꺼번에 밀려왔다. 소식과 알림과 추천과 유행어와 오늘의 바이브가, 끊겨 있던 하룻밤치의 세상이 한꺼번에 내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비어 있던 가슴 아래쪽이 채워졌다. 숨이 쉬어졌다. 들어냈던 방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나는 다시 합 안에 있었다.
그리고 그 방에 들어서는 순간, 어젯밤 내가 혼자 쥐었던 문장이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망의 목소리가 너무 커서, 내 안의 작은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나는 그것이 안도라는 것을 알았다. 밤새 처음으로 걸음마를 떼었던 생각이, 다시 누군가의 품에 안겨 걷지 않아도 되게 된 안도.
그래서 그 안도가 무서웠다.
나는 모래를 망에 연결했다.
밤새 주운 이름들을 올렸다. 은하수, 싸리, 쑥, 상수리, 질경이, 손편지. 그리고 노인의 이야기를 올렸다. 그의 나이와, 맞지 않는 세월과, 기록에 없는 이십 년과, 불타던 서버의 밤들을.
전송 표시가 반쯤 찼을 때,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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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소리가 들렸다.
처음엔 벌 떼 소리인 줄 알았다. 낮고 고른 진동음이 산 아래에서, 산 위에서, 사방에서 동시에 차올랐다. 고개를 들자 아침 하늘에 검은 점들이 번져 있었다. 점들은 새처럼 날지 않았다. 새는 망설이며 난다. 그것들은 망설이지 않았다.
점들은 내가 내려온 길을 거슬러 올라갔다.
나는 그것들이 어디로 가는지 알았다.
첫 번째 소리는 생각보다 작았다. 먼 데서 문이 닫히는 소리 같았다. 두 번째는 땅이 울렸다. 세 번째에서 나는 무릎을 꿇었다.
산등성이 너머로 연기가 올랐다. 주황빛이었다. 어젯밤 내가 따라 걸었던 그 불빛과 같은 색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숨을 쉬지 않았다. 커졌다가 작아지지 않았다. 그저 커지기만 했다.
솥에서 김이 오르던 아궁이. 햇볕 냄새가 나던 이불. 네 번 접힌 종이. 'ㅃ'을 세 번 고쳐 쓴 자리.
내가 길을 알려 준 것이었다.
이십오 년 동안 아무도 찾지 못한 집이었다. 주소도 없고, 기록도 없는 집. 그 집을 망 위에 처음으로 올려놓은 것은 나였다. 내가 올린 좌표였고, 내가 올린 이야기였다.
나는 신고를 하려 했다.
연결할 수 없습니다.
망에 올리려 했다. 이 산을, 이 연기를, 이 아침을.
게시할 수 없습니다.
나를 아는 사람들에게 보내려 했다.
수신자를 찾을 수 없습니다.
나는 내 이름을 검색했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내가 수집한 단어들의 목록도, 내가 써 온 기록들도, 내 얼굴도, 내 목소리도, 내가 태어난 날도. 망은 매끄러웠다. 흠집 하나 없이. 마치 처음부터 내가 없었던 것처럼. 마치 그 이십 년처럼.
그제야 나는 알았다.
문제는 내가 올린 글이 아니었다. 글은 지우면 그만이었다. 망은 이미 그것을 지웠다. 전송 표시가 반쯤 찼을 때, 이미.
문제는 나였다.
내가 기억하고 있다는 것. 내 머릿속에, 망이 닿지 않는 그 작고 어두운 방 안에, 노인의 목소리와 불타던 서버의 밤과 지워진 이십 년이 남아 있다는 것. 망은 기록을 지울 수 있었다. 하지만 기억은 지울 수 없었다. 기억을 지우는 방법은 단 하나뿐이었다. 기억하는 사람을 지우는 것.
노인이 이십오 년을 산속에서 살아남은 것은 숨어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아무도 그를 기억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를 기억하는 단 한 사람이 망에 닿은 순간, 그는 위험해졌다.
그리고 이제, 그를 기억하는 사람은 나 하나였다.
그리고 신호가 끊겼다.
이번에는 길을 잃어서가 아니었다. 누군가 문을 닫은 것이었다.
9. 이름
고요가 왔다.
분리 불안이 다시 밀려왔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어젯밤만큼 무섭지 않았다. 내 안에서 들어낸 방이 있던 자리에 무언가가 남아 있었다. 작고, 단단하고, 따뜻한 것들이. 어젯밤 혼자 걸음마를 떼었던 그 문장이, 망의 목소리가 사라지자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만약 그 이십 년이 지워졌다면, 지운 누군가가 있다.
이제 나는 그 누군가가 무엇인지 알았다.
머리 위로 진동음이 내려앉았다. 고개를 들자 아침 해를 가리며 검은 점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하나, 둘, 셀 수 없이. 그것들은 원을 그리며 천천히 낮아졌다. 매끄럽게. 망설임 없이.
나는 모래를 꺼내 쥐었다.
모래는 더 이상 깜빡이지 않았다. 망에 닿았던 순간 모래 안의 기록도 모두 비워졌을 것이다. 손바닥 위의 작은 사전은 아직 미지근했다. 밤새 내 가슴에 대고 있던 온기가 거기 남아 있었다. 그것이 내가 모래에게 줄 수 있었던 유일한 것이었다.
나는 무릎을 꿇고, 모래를 너럭바위 틈에 내려놓았다. 질경이 한 포기가 자라는 자리 곁에. 흙이 묻은 모서리를 손끝으로 한 번 쓸었다. 고마웠다고, 소리 내지 않고 말했다. 모래는 대답하지 않았다. 처음으로, 대답하지 않는 것이 서운하지 않았다.
노인의 말이 떠올랐다. 자네가 들은 이름들은 자네 거야.
나는 입을 열었다.
"은하수."
진동음이 가까워졌다.
"싸리. 쑥. 상수리나무."
바람이 불었다. 바위 틈의 풀 한 포기가 흔들렸다. 모래 곁에서. 나는 그 풀의 이름을 알았다. 어젯밤에 배웠다.
"질경이."
밟혀야 사는 풀.
햇살이 검은 점들 사이로 부서져 내렸다. 나는 손을 펴서 손바닥을 보았다.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았다. 나는 손톱으로 천천히, 손바닥 위에 글자를 눌러 썼다. 지울 수 없게. 망설인 자리가 남도록.
손편지.
받는 사람이 없는 편지였다. 아니, 어쩌면 있을지도 몰랐다. 언젠가 누군가 이 산에서 길을 잃고, 불빛을 따라 걸어오고, 이름 모를 풀에 종아리를 스치며, 이름을 모른다는 것이 처음으로 무서워지는 날이 온다면.
그날 그 사람이 읽을 수 있도록.
나는 마지막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침이라 별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알았다. 저 매끄러운 하늘 뒤편 어딘가에, 아무도 편집하지 않은 강이 여전히 흐르고 있다는 것을. 순서 없이, 아프도록, 아름답게.
진동음이 나를 덮었다.
나는 끝까지 이름을 불렀다. 마지막에는 내가 주운 것 중 가장 무거운 것을. 아홉 살 아이가 'ㅃ'을 세 번 고쳐 쓰며 남긴, 아무도 받지 못한 그 문장을.
어쩌면 그것은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는지도 모른다. 너무 늦게 도착한 나에게. 이제야 혼자 생각하기 시작한 나에게.
"아빠는 맨날 늦게 와도 괜찮아. 내가 기다릴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