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돈이 돈을 낳는 순간

인류가 화폐를 발명한 순간부터 '빌려주고 갚는' 행위는 존재했다. 그리고 빌려준 대가로 얼마를 더 받을 것인가 하는 문제, 즉 이자는 경제사에서 가장 오래된 화두 중 하나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점토판에는 이미 연 20% 수준의 이자율이 기록되어 있다. 함무라비 법전은 곡물 대출과 은 대출의 상한을 따로 정했다. 인류 최초의 성문법 중 하나가 이자 상한 규제였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이자는 결국 시간의 가격이다. 지금의 1만 원과 1년 뒤의 1만 원이 다르다는 것, 그 차이를 숫자로 표현한 것이 금리다. 그런데 시간의 가격은 언제나 권력의 관심사였다. 교회는 그것을 금지했고, 국왕은 그것을 떼먹었고, 현대의 중앙은행은 그것을 0으로 만들거나 심지어 음수로 만들었다.

이 글은 그 4천 년에 걸친 조작의 기록이다. 그리고 조작의 청구서가 언제나 뒤늦게, 그러나 반드시 청구했다는 기록이기도 하다.


2. 중세 유럽의 이자, 10%에서 45% 사이의 종교적 교리까지

중세 유럽의 금융 풍경은 오늘날과 전혀 달랐다. 9세기부터 15세기에 이르는 동안 유럽 사회는 농경 중심에서 화폐 경제로 전환되면서 자본 유통의 필요성이 커졌지만, 종교적 윤리가 이를 정면으로 가로막았다.

중세 가톨릭 교회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화폐는 화폐를 낳지 않는다(Pecunia pecuniam non parit) 는 명제를 신학적으로 해석해 이자 수취를 금지했다. 325년 니케아 공의회는 성직자에게 월 1%(연 12.7%)를 넘는 대금을 금했고, 1179년 제3차 라테란 공의회는 고리대금업자를 파문하고 기독교식 매장을 거부했다. 1215년 제4차 라테란 공의회, 그리고 1230년대 그레고리우스 9세의 교령집은 이를 교회법 체계로 완성했다.

그렇다면 중세 유럽의 실제 이자율은 얼마였을까? 일반적으로 연 10–45% 수준이었으며, 위험도가 높은 원거리 무역이나 전시 대출에서는 그보다 훨씬 높았다. 규제는 이자를 없애지 못했다. 다만 이자를 이자가 아닌 다른 이름으로 부르게 만들었을 뿐이다. 환전 수수료(cambium), 지연 배상금(damnum emergens), 기회비용 보상(lucrum cessans), 그리고 '선물'. 뒤에서 보겠지만 이 위장은 훗날 유럽 최대 은행 두 곳을 무너뜨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자 금지가 만든 것은 무이자 사회가 아니라 불투명한 고금리 시장이었다. 이것이 이 글에서 반복될 첫 번째 패턴이다.


3. 이자를 금지한 이슬람, 이자를 이원화한 유대교

이자에 대한 종교적 시각은 문화마다 극명하게 갈렸다.

이슬람은 코란의 리바(riba, 폭리) 금지 계율(제2장 275절)에 따라 이자 수취를 철저히 금지한다. 이념적 근거는 명확하다. 생산적 노력과 위험 부담 없이 시간만으로 불로소득을 얻는 것을 부의 편중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슬람 금융에서는 우리가 아는 형태의 대출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대신 무라바하(원가가산 매매), 무다라바(손익 공유 투자), 이자라(리스), 수쿠크(자산 기반 증권)처럼 실물 거래와 위험 공유를 매개로 수익을 만든다. 형식은 다르지만 자본에는 가격이 붙는다. 다만 그 가격을 '시간'이 아니라 '위험과 실물'에 연동시킨 것이다.

최근 블록체인 STO에서도 수쿠크 기반의 투자 상품이 나오는 것도 이와 같이 이슬람 국가의 이자 제한법을 우회하려는 것이다.

반면 유대교는 이원적 입장을 취했다. 구약성서 신명기 23장 19~20절은 "타인에게는 이자를 받되 네 형제에게는 이자를 받지 말라"고 명시한다. 즉 같은 유대인에게는 이자를 받을 수 없지만, 이방인에게는 받을 수 있었다. 에스겔서는 이자를 가증한 죄로 규탄하지만, 그 규율의 적용 범위는 '동족'이었다.

기독교 세계는 대부업을 금지했고, 유대교 율법은 이방인 상대 대부업을 허용했다. 이 두 규범이 만나는 지점에서 중세 유럽 금융의 기묘한 구조가 만들어졌다.


4. 유대인, 고리대금업자로 몰린 구조적 이유

왜 중세 유럽에서 유대인이 고리대금업의 대명사가 되었는가? 이것은 민족성의 문제가 아니라 제도가 만든 산업 종사자들의 문제다.

첫째, 종교 교리의 비대칭이다. 기독교인에게 금지된 영역이 유대인에게는 열려 있었고, 교회가 대부업을 죄로 규정할수록 그 시장은 유대인만이 선택할 수 있었다. 기독교도가 돈놀이를 한다면 바로 교회에서 명부를 제외시키는 파문의 대상이 되었다.

둘째, 사회적 제약이 결정적이었다. 중세 유대인은 기독교 길드에 가입할 수 없었고, 토지 소유가 제한되어 농업에 종사할 수 없었으며, 공직에서 배제되었다. 상업과 금융은 그들에게 열린 몇 안 되는 생존 경로였다. 선택이 아니라 유일하게 남은 잔여 영역이었다.

셋째,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권력의 필요였다. 이들은 단순한 사채업자를 넘어 궁정 유대인(Court Jew, Hoffaktor) 으로서 왕실과 제후의 재정을 담당했다. 군대 보급, 조폐소 운영, 조세 청부, 차관 교섭, 채권 발행 — 오늘날 재무장관과 국책은행장의 역할을 겸했다.

그러나 이 역할은 축복이자 저주였다. 이들은 법적으로 왕의 보호를 받는 대신 왕의 재산에 준하는 지위였다. 보호자가 사라지면 지위도 사라졌다.

합스부르크 제국의 군수 조달을 총괄했던 사무엘 오펜하이머는 1697년 빈에서 폭동의 표적이 되었고, 그가 사망하자 제국 재정은 곧바로 파산 위기에 빠졌다. 뷔르템베르크 공국의 재정을 맡았던 요제프 쥐스 오펜하이머는 1737년 후원자였던 카를 알렉산더 공작이 급사하자마자 체포되어 이듬해 처형되었다. 그가 집행한 정책은 공작의 것이었지만, 원망은 세금을 걷고 국가 재정을 관리한 유태인, 그의 것이 되었다.

중세 유럽의 권력자들은 자신에게 돌아올 원망을 유대인에게 돌렸다. 세금을 걷은 것은 왕이었고 걷으러 온 것은 유대인이었다. 전쟁을 벌인 것은 왕이었고 그 자금을 조달한 것은 유대인이었다. 그리고 갚을 때가 되면, 채무를 지운 것도 왕이었다.


5. 왕은 갚지 않는다 - 중세 소버린 디폴트의 계보

중세에서 돈을 빌려준다는 행위는 큰 정치적인 위험을 감수하고 해야하는 고위험 투기적 사업이었다. 중세의 이자율이 왜 그렇게 높았는가를 설명하는 가장 강력한 변수는 교회법이 아니라 채무자가 재판관을 겸했다는 사실이다.

현대의 채권자는 채무자가 갚지 않으면 법원에 간다. 중세의 채권자가 왕에게 돈을 빌려주면, 그 왕이 곧 법원이었다. 집행이 불가능한 채권의 가격은 무엇으로 매겨지는가? 프리미엄이다. 연 45%라는 숫자의 상당 부분은 탐욕이 아니라 소버린 리스크의 가격이었다.

왕과 제후들이 주로 돈을 빌렸고 도시와 국가의 권력자들이 돈을 빌리고 멋대로 갚지 않았다.

5-1. 필리프 4세, 채권자를 없애면 채무도 없어진다

프랑스의 필리프 4세(재위 1285–1314)는 이 논리의 가장 노골적인 실행자였다. 플랑드르 전쟁과 잉글랜드와의 분쟁으로 재정이 고갈되자 그는 세 단계를 밟았다.

먼저 화폐를 새로 제조했다. 은 함량을 낮춘 주화를 찍어내 실질 채무를 줄인 이 조치로 그는 '위조지폐범 왕(le Faux-Monnayeur)'이라 불렸다. 이것은 인류 최초의 대규모 인플레이션 조세이자, 오늘날 양적완화 논쟁의 원형을 필리프 4세가 보여줬다.

그것으로 부족하자 1306년 유대인을 왕국에서 추방하고 그들이 보유한 채권을 왕실이 몰수했다. 채권자를 쫓아내면서 동시에 그 채권자에게 진 빚을 지우고, 나아가 그들이 프랑스인에게 갖고 있던 채권까지 국고로 흡수한 이중 이익을 챙겼다. 결국 돈을 관리할 유태인들이 없어지자 왕국의 재정은 더 심각하게 경색되었다.

그리고 1307년 10월 13일 금요일, 그는 유럽 최대의 금융 조직이던 템플기사단을 일제히 체포했다. 이단 혐의로 기소된 이 조직은 1312년 해산되었고 1314년 총장 자크 드 몰레는 화형당했다. 필리프 4세는 그들에게 막대한 채무를 지고 있었다.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템플 기사단에게진 왕의 채무는 유예되었고 이자 지급도 되지 않았다. 왕은 디폴트를 무력을 동원해서 했던 것이다.

교훈은 잔인할 만큼 단순하다. 중세에 왕에게 돈을 빌려준다는 것은, 그 왕이 언젠가 당신을 없애는 편이 갚는 것보다 싸다고 계산할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었다.

5-2. 잉글랜드 - 채권자를 갈아치우는 왕조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는 1275년 유대인 법령으로 유대인의 대부업을 금지해 그들의 경제적 기반을 파괴한 뒤, 1290년 추방령으로 잉글랜드에서 유대인 공동체를 완전히 축출했다. 그 직전 수십 년간 왕실은 특별세 형태로 유대인 자산을 반복적으로 흡수한 상태였다. 더 이상 짜낼 것이 없어졌을 때 유태인들을 국외로 추방을 했다.

유대인이 사라진 자리는 이탈리아 은행이 채웠다. 루카의 리카르디 가문이 1270년대부터 왕실 재정을 맡았으나 1290년대 프랑스와의 전쟁 와중에 자산을 압류당하고 파산했다. 그 자리를 피렌체의 프레스코발디가 이어받았고, 1310년대에 역시 몰락했다. 그다음이 바르디와 페루치였다.

잉글랜드 왕실은 한 세기 동안 채권자를 세 번 갈아치웠다. 그리고 매번, 갈아치워진 쪽은 파산했다.

5-3. 에드워드 3세와 바르디·페루치 - 최초의 시스템 리스크

1337년 백년전쟁을 시작한 에드워드 3세는 유럽 최대 은행 두 곳에서 전비를 조달했다. 피렌체의 바르디와 페루치. 메디치 이전 시대 유럽 최강의 금융 가문이자, '대마불사'라는 말이 생기기 전의 대마불사였다.

기록에 따르면 바르디는 약 90만 플로린, 페루치는 약 60만 플로린을 왕에게 빌려주었다. 담보는 잉글랜드의 양모 관세 수입이었다. 전쟁은 빨리 끝날 예정이었다. 이름이 백년전쟁이 된 것에서 알 수 있듯, 미래는 예측한 자들의 생각처럼 쉽게 그렇게 되지 않았다.

페루치는 1343년, 바르디는 1345년 지급을 정지했다. 두 은행은 이탈리아 전역의 예금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손실은 피렌체 경제 전체로 번졌다. 유럽 금융시장이 통째로 흔들린 최초의 기록된 시스템 리스크이며 유럽을 흔든 대공황이었다.

여기서 두 가지 세부 사항이 중요하다.

첫째, 에드워드 3세는 채무를 공식적으로 부인하지 않았다. 그의 회계 감사관들은 장부를 재감사해 채무 금액을 대폭 삭감한 뒤, 확정된 잔액마저 지급하지 않았다. 부도가 아니라 '재조정'이었다. 21세기 국가부채 협상에서 우리가 헤어컷(haircut)이라 부르는 그것이다. 현대 연구는 심지어 1345년 이후에도 왕실이 바르디 대리인들에게 일부를 지급했음을 보여준다. 문제는 그것이 원금의 극히 일부였다는 점이다.

둘째, 더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왕이 갚지 않은 '채무'의 상당 부분은 원금이 아니라 미지급 이자였다. 교회법상 이자를 명시할 수 없었으므로 그것은 '선물', '수고비', '지연 보상'이라는 이름으로 장부에 올라 있었다. 연구자들은 에드워드의 채무 중 약 3분의 2가 원금 손실이 아니라 약속된 보상의 미지급이었다고 보고 있다.

이자를 금지한 교회법이 이자를 회계적으로 불투명하게 만들었고, 불투명한 채권은 떼어먹기 쉬웠다. 규제가 만든 그림자가 규제의 수혜자를 물어뜯은 셈이다.

5-4. 합스부르크와 푸거, 그리고 펠리페 2세의 네 번의 파산

16세기의 무대는 더 커졌다. 아우크스부르크의 야코프 푸거는 1519년 카를 5세의 신성로마제국 황제 선거 자금 대부분을 댔다. 황제의 관을 사실상 은행이 사준 것이다. 대가로 푸거 가문은 티롤과 헝가리 광산 이권을 얻었다.

그러나 카를 5세의 아들 펠리페 2세는 신대륙에서 은이 쏟아져 들어오는 제국의 군주였음에도 1557년, 1560년, 1575년, 1596년 네 차례에 걸쳐 지불정지를 선언했다. 아메리카의 은은 도착하는 족족 유럽의 전쟁에 소진되었고, 은의 유입 자체가 물가를 밀어올렸다.

특히 1575년의 지불정지는 제노바 은행가들과의 아시엔토(단기 차입 계약)를 정지시키면서 카스티야 내부 신용시장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정기시가 중단되고 은행이 무너지고 상거래가 마비되었다. 국왕의 채무 불이행이 실물경제를 정지시킨 초기 사례다.

푸거 가문은 결국 합스부르크 채권으로 몰락했다. 유럽에서 가장 부유했던 금융 가문이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군주의 고객이었기 때문에 망한 것이다.

5-5. 이 계보가 말하는 것

바르디, 페루치, 리카르디, 프레스코발디, 푸거, 제노바 은행가들, 그리고 이름 없이 사라진 궁정 유대인들. 이들의 공통점은 가장 신용도가 높아 보이는 채무자에게 집중 노출되었다는 것이다.

중세 고금리의 정체는 이것이다. 이자율은 시간의 가격에 집행 불가능성의 프리미엄을 더한 값이었다. 왕이 갚지 않을 수 있다면, 왕에게 빌려주는 돈의 리스크는 이자라는 것으로 올라간다. 그리고 그 값이 올라가면 교회는 다시 고리대금이라 비난하고, 비난은 채권자에게 향한다.

오늘날 우리는 이것을 국가신용등급이라 부른다. 이름만 바뀌었을 뿐이다.


6. 이자 제한법의 탄생 - 1962년 한국의 선택

이자의 폐해를 막으려는 법적 규제는 생각보다 오래되었다. 한국의 경우 1911년 일제강점기의 '이식제한령'이 시초다. 그러나 실효성을 거두지 못했고, 1962년 대한민국 법률 제971호로이자제한법이 새로 제정되었다.

초기 최고한도는 연 20%였다. 그러나 실제 시장금리보다 한참 낮아 아무도 지키지 않았고, 1965년 연 40%로 상향 조정되었다. 1970년대에는 36.5%, 1972년 8·3 긴급조치로 25%로 다시 조정되는 등 정부의 개입은 끊임없이 시도되었다.

주목할 점은 방향이다. 상한을 낮췄더니 시장이 지하로 숨었고, 그래서 상한을 올렸다. 규제 당국이 시장금리를 따라간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었다.


7. 명동 사채시장과 8·3 조치, 계약을 무효화한 국가

한국 경제 성장기 사채시장의 중심은 명동이었다. 1970년대 초 기업들이 떠안은 사채의 가중평균 금리는 월 3.84%, 연 46% 에 달했다. 기업 부채비율은 400%까지 치솟았다. 은행 문턱을 넘지 못한 기업들이 명동에서 연 46%로 운전자금을 조달해 수출하던 시대였다.

1972년 8월 3일, 박정희 정부는 '경제의 안정과 성장에 관한 긴급명령'을 발동했다. 통칭 8·3 조치. 모든 기업 사채를 신고하게 한 뒤 기존 계약을 일괄 무효화하고, 월 1.35% 수준의 저리로, 3년 거치 5년 분할상환 조건으로 강제 전환했다. 채권자의 재산권을 국가가 행정명령 하나로 재작성한 것이다.

효과는 즉각적이었다. 기업의 금융비용이 급감했고 부도 도미노가 멈췄다. 신고된 사채 규모는 정부의 예상을 크게 웃돌았고, 그중 상당 부분이 기업주 자신이 위장한 자기 사채였다는 사실도 이때 드러났다.

그러나 명동 사채시장은 사라지지 않았다. 제도권 금융의 신용평가 역량이 그만큼 커진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시장은 더 음성화되었고, 1982년 이철희·장영자 어음 사기 사건, 1997년 이전까지 이어진 각종 사채 파동으로 반복해 모습을 드러냈다. 필리프 4세가 채권자를 추방한 것과 8·3 조치가 채권을 무효화한 것 사이의 거리는, 700년보다 가깝다.


8. IMF 외환위기 - 규제를 없애자 이자가 폭발했다

1997년 IMF 외환위기는 한국 이자 규제 역사의 분수령이었다. 가용 외환보유액이 39억 달러 수준까지 급감한 극한 상황에서, 정부는 IMF 프로그램에 따라 1998년 1월 이자제한법을 폐지했다.

이론은 명확했다. 금리는 자원 배분의 신호이며, 상한을 없애면 자금이 필요한 곳으로 흐른다는 것이다. 실제로 콜금리가 연 30%를 넘나들며 외자를 붙잡았고, 환율 방어에는 기여했다.

문제는 그 이론이 개인 신용시장에서는 다르게 작동했다는 점이다. 연 수백 %에 달하는 사채와 불법 추심이 기승을 부렸다. 상한이 사라진 시장에서 협상력이 없는 차주는 가격 수용자가 아니라 가격 피해자였다. 대량 실업과 신용불량자 급증이 겹치며 서민 금융은 무법 지대가 되었다.

그 결과 2007년 이자제한법이 부활했다. 이후 상한은 단계적으로 낮아져 현재 이자제한법 및 대부업법상 법정 최고금리는 연 20%다. (2002년 대부업법 제정 당시 연 66%에서 출발해 49%, 44%, 39%, 34.9%, 27.9%, 24%를 거쳐 2021년 7월 20%로 내려왔다.) 2025년 7월부터는 연 60%를 초과하는 대출 계약은 원금과 이자 모두 무효로 하는 조항까지 도입되었다.

폐지와 부활 사이 10년, 그리고 부활 이후 20년. 우리는 같은 질문을 두 번 던진 셈이다. 상한이 없으면 어떻게 되는가, 그리고 상한이 낮으면 어떻게 되는가?


9. IMF가 만든 일본계 자금의 그림자, 러시앤캐시와 제2금융권

2000년대, 일본계 자금을 기반으로 한 러시앤캐시(아프로파이낸셜)산와머니 등 대부업체가 급성장했다. 배경에는 일본 시장의 사정이 있었다. 2006년 일본 최고재판소가 '그레이존 금리'로 받은 이자의 반환을 인정하면서 일본 소비자금융업계가 대규모 과불금 반환 사태로 무너졌고, 갈 곳을 잃은 자본과 노하우가 한국으로 넘어왔다. 한국은 당시 최고금리가 훨씬 높았고 규제도 없다시피해서 느슨했다.

이들은 공격적인 TV 광고와 무인 심사로 시장을 장악했다. 그리고 최고금리를 초과해 받다가 적발되어 영업정지 처분을 받았고, 결국 시장에서 철수했다.

러시앤캐시의 퇴장은 흔히 규제의 승리로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구조를 보면 다르다. 최고금리가 24%에서 20%로 내려간 뒤, 조달금리가 오르는 국면에서 저신용자 대출은 수익 구조 자체가 성립하지 않았다. 대부업체들은 저신용자를 거절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신용점수 하위 구간의 대출 승인율은 급락했고, 그 수요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연 20%로 빌릴 수 없게 된 사람이 연 15%로 빌리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는 등록되지 않은 그레이 마켓에서 연 300%로 빌리게 된다.

이것은 중세 교회법이 만든 결과와 정확히 같은 불합리한 구조를 되풀이하고 있다. 이자 상한은 이자율을 낮추지 못한다. 다만 거래를 관측 가능한 영역 밖으로 밀어낸다. 시장 개입은 단기적으로 효과적일 수 있지만, 중장기적으로는 예기치 못한 곳에서 청구서가 날아온다.


10.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 이자를 0으로 만든 실험의 시작

21세기의 이자 조작은 사채업자가 아니라 중앙은행이 주도했다.

닷컴 버블 붕괴와 9·11 이후, 앨런 그린스펀의 연준은 정책금리를 2003년 연 1%까지 내리고 1년간 유지했다. 대공황 이후 최저였다. 값싼 돈은 부동산으로 흘렀다. 소득도, 직업도, 자산도 없는 차주에게 나가는 대출을 업계는 NINJA 론(No Income, No Job, No Assets) 이라 불렀다. 초기 2년간 낮은 고정금리를 적용하다 이후 시장금리에 연동되는 변동금리 상품(2/28 ARM)이 대량 판매되었다.

이 상품은 집값이 계속 오른다는 가정 위에서만 작동했다. 금리가 리셋되기 전에 리픽싱, 재융자하면 되기 때문이다. 연준이 2004년부터 2006년까지 금리를 5.25%까지 끌어올리자 가정이 무너졌다. 2007년부터 리셋이 도래한 대출이 연쇄 연체에 빠졌고, 그 대출은 이미 MBS와 CDO로 증권화되어 전 세계 금융기관 장부에 흩어져 있었다.

2008년 9월 리먼브라더스가 파산했다. 연준의 대응은 전례가 없었다. 2008년 12월, 정책금리를 사실상 0(0–0.25%)으로 내렸다. 그리고 여기서 멈추지 않고, 국채와 MBS를 직접 매입하는 양적완화(QE)를 세 차례에 걸쳐 시행했다. 단기금리를 0으로 만든 뒤 장기금리까지 눌렀다.

에드워드 3세가 채무를 재감사해 깎았다면, 21세기의 방식은 금융공학을 이용하여 더 우아하게 돈을 풀고 이자를 없앴다. 채무의 명목가액은 그대로 두고 그 위에 붙는 시간의 가격만 0으로 만든다. 채권자는 아무것도 빼앗기지 않았다고 느낀다. 다만 아무것도 받지 못할 뿐이다.

위기는 진화되었다. 그러나 2008년의 처방은 이후 15년간 세계 자산 가격의 기본 전제가 되었다. 무위험 수익률이 0이면 모든 자산의 밸류에이션이 팽창한다. 우리가 지난 10여 년간 목격한 부동산, 주식, 스타트업, 암호자산의 가격은 상당 부분 0금리라는 분모의 함수였다.

대신 넘쳐나는 유동성이 부동산, 비트코인, 주식 시장으로 흘러들었다. 넘쳐나는 유동성으로 샴페인을 터트리고 축제를 벌인 것이다.


11. 일본- 30년간 이자를 없앤 나라

미국이 5년간 한 이 제로 금리 실험을 일본은 30년간 지속했다.

1990년 자산 버블이 붕괴한 뒤 일본은행은 금리를 계속 내렸고, 1999년 2월 사실상 제로금리 정책에 도달했다. 2001년에는 세계 최초로 양적완화를 도입했다. 2013년 구로다 하루히코 총재 취임 후에는 '차원이 다른 완화'라 불린 QQE로 국채를 대량 매입했다.

그리고 2016년 1월, 일본은행은 마이너스 금리(-0.1%) 를 도입했다. 은행이 중앙은행에 돈을 맡기면 이자를 받는 것이 아니라 보관료를 내야 한다. 같은 해 9월에는 10년물 국채 금리를 0% 근처에 고정하는 수익률곡선제어(YCC)를 시작했다. 국가가 장기 시장금리의 값을 직접 지정한 것이다.

이것은 인류사에서 이자에 가해진 가장 극단적인 개입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화폐가 화폐를 낳지 않는다고 했지만, 일본은행은 화폐가 화폐를 잡아먹게 만들었다.

결과는 양면적이었다. 디플레이션의 파국은 막았다. 그러나 대가도 명확했다.

첫째, 좀비 기업이다. 이자를 갚을 수 없는 기업이 이자가 없어서 살아남았다. 구조조정이 지연되고 생산성 향상이 정체되었다.

둘째, 연금과 보험의 붕괴 압력이다. 장기 부채를 진 기관은 일정 수익률을 가정하고 설계된다. 그 가정이 0이 되면 설계 자체가 무너진다.

셋째, 그리고 가장 세계적인 파급을 낳은 것은 엔 캐리 트레이드다. 0%에 가까운 금리로 엔화를 빌려 금리가 높은 나라의 자산에 투자하는 이 거래는 30년간 누적되어 한국은행 추산 기준 한때 500조 엔대 규모에 이르렀다. 일본의 저금리는 일본에만 머물지 않았다. 전 세계 자산 가격의 밑바닥에 깔린 지반이었다.

넷째, 정부 부채다. 이자가 0일 때 국채 발행에는 정치적 비용이 없다. 일본의 정부부채는 GDP 대비 200% 수준까지 누적되었다. 이자가 0이라는 전제 아래에서만 지속 가능한 구조였다.


12. 그리고 일본이 금리를 올리기 시작했다

2024년 3월, 일본은행은 17년 만에 금리를 올리며 마이너스 금리 정책을 종료했다. YCC도 폐기했다. 같은 해 7월 추가 인상이 단행되자, 8월 5일 시장은 대답했다. 닛케이225가 하루에 12.4% 폭락했고 코스피는 8.77% 하락했다. 엔 캐리 청산이 촉발한 글로벌 블랙먼데이였다.

지반이 움직이면 그 위의 모든 것이 흔들린다는 것을 시장은 그날 배웠다.

이후 일본은행은 신중하게, 그러나 멈추지 않고 걸어왔다. 2025년 1월 0.5%, 2025년 말 0.75%를 거쳐 2026년 6월 정책금리는 1.0%에 도달했다. 31년 만의 최고 수준이다.

그러나 2026년 여름 현재 일본 시장의 진짜 문제는 정책금리가 아니라 장기금리다.

2026년 8월 중순, 일본 10년물 국채 금리는 2.9%를 넘어섰다. 1996년 9월 이후 30년 만의 최고치다. 원인은 두 가지가 겹쳤다.

하나는 다카이치 사나에 정부의 확장 재정이다. 정부의 경제재정 기본방침에서 '재정건전화'라는 문구가 빠졌고, 성장·위기관리 분야 예산 요구에 상한을 두지 않기로 하면서 국채 발행 확대 우려가 커졌다. 채권시장은 발행이 실제로 늘기 전에 먼저 팔았다.

다른 하나는 일본은행의 국채 매입 축소다. 30년간 시장의 최대 매수자였던 주체가 물러나면, 남은 매수자는 더 높은 금리를 요구한다.

여기서 파급이 시작된다. 일본은 세계 최대의 미국 국채 해외 보유국이다. 일본 국내에서 2.9%를 받을 수 있다면, 환헤지 비용을 감수하며 미국 국채를 살 이유가 줄어든다. 실제로 미국 30년물 국채 금리는 5.3%를 넘어 19년 만의 최고 수준까지 올라섰다. 도쿄의 재정 우려가 워싱턴의 조달비용을 밀어올리는 나비효과다.

한국도 무관하지 않다. 2026년 상반기 외국인 투자자들은 한국 주식시장에서 대규모 순매도를 이어가며 일본으로 자금을 옮겼다. 한·일 장기금리 동조화도 강해졌다.

30년간 세계 금융시장은 '일본은 영원히 0%'라는 가정 위에 지어졌다. 그 가정이 지금 해체되는 중이다.

지난 30년간 일본의 엔화는 저렴한 돈으로 전 세계의 투기 자본의 판돈이 되어 줬다. 하지만 지금 일본 엔화에는 시간의 가겨이 붙기 시작했고 전세계에서 유동성을 빨아당기고 있다. 일본이 미국의 국채를 팔기 시작하자, 미국 재무부는 개입을 시작했다.

지금 우리는 화폐 전쟁 가운데에 있다.


13. 이자의 제왕, 미국 국채 금리

현대 금융에서 미국 국채 금리는 '이자의 제왕' 이다. 10년물 미 국채 금리는 글로벌 채권의 벤치마크이자 전 세계 자산 가격의 할인율이며, 사실상 무위험 수익률의 정의다. 이 숫자가 움직이면 서울의 주택담보대출부터 나이로비의 인프라 채권까지 재계산된다.

2026년 8월 현재 미국 30년물 국채금리는 5.3%를 넘어 2007년 이후 최고 수준이다. 정책금리와 장기금리가 함께 높은 국면이다.

연준은 케빈 워시 의장 체제에서 기준금리를 연 3.50–3.75%로 동결하고 있다. 다만 6월 FOMC의 점도표는 연말 금리 중간값을 3.8%로 제시했는데, 이는 현재 상단보다 높다. 위원 다수가 인하가 아니라 인상을 전망한 것이다. 호르무즈 해협 봉쇄 우려가 촉발한 에너지 가격 충격으로 개인소비지출 물가 전망이 큰 폭으로 상향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구조적 문제가 겹친다. 미국은 세계 최대의 차입자이면서 동시에 세계 최대의 이자 지급자다. 국채 이자 지급액은 이미 주요 재정 지출 항목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규모다. 금리가 오르면 이자가 늘고, 이자를 갚기 위해 국채를 더 발행하고, 발행이 늘면 금리가 또 오른다.

펠리페 2세가 아메리카의 은으로도 네 번 파산한 이유가 이것이다. 수입이 아무리 커도 이자의 복리를 이기지 못하면 구조는 무너진다. 차이가 있다면, 미국의 국채는 세계 준비자산이고 미국은 그 통화를 발행한다는 점이다. 그것이 얼마나 강력한 방패인지는 지난 80년이 증명했다. 그러나 방패는 무한하지 않다.


14. 한·미 금리 역전, 그리고 물길을 되돌리는 대가

2022년 미 연준의 초긴축 이후 시작된 한미 금리 역전은 3년 넘게 이어졌다. 한국은행은 오랫동안 기준금리를 2.50%에 묶어두었다. 부동산과 가계부채라는 족쇄 때문이었다.

한국은행이 장기간 이자율을 인위적으로 누르는 것은 계곡으로 흐르는 물을 거꾸로 흐르게 하는 것과 같다. 자본은 더 높은 수익을 쫓는다. 한미 금리차가 벌어지면 자금은 미국으로 흐르고, 원화는 약해지고, 수입물가가 오르고, 물가가 오르면 결국 금리를 올려야 한다. 물길을 막는 데는 비용이 든다. 다만 그 비용이 지연되어 나타날 뿐이다.

그리고 2026년 여름, 그 청구서가 도착하고 있다.

한국은행은 2026년 7월 기준금리를 0.25%p 인상한 데 이어, 8월 27일 다시 0.25%p를 올려 기준금리를 연 3.00%로 결정했다. 한 달 만의 연속 인상, 이른바 백투백이다. 2025년 5월 2.50%로 내린 이후 1년 2개월간 이어진 동결 기조가 끝나고 본격적인 긴축 사이클에 들어선 것이다. 시장에는 동결 전망도 상당했다.

신현송 한국은행 총재는 기자간담회에서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는다'는 표현을 썼다. 선제적으로 대응하면 기대인플레이션을 조기에 안정시켜 긴축의 강도와 기간을 줄일 수 있고, 결과적으로 성장 측면의 비용을 최소화할 수 있다는 논리다. 연속 인상이라는 이례적 조치 자체가 시장에 보내는 신호라고 그는 설명했다.

배경에는 근원물가 전망 상향, 1300원대에 머물러 있지만 역사적으로는 여전히 높은 환율, 그리고 수입물가 압력이 있다. 반도체 수출 호황으로 올해 성장률 전망이 3.3%로 대폭 상향되면서 긴축의 부담을 견딜 여력이 생겼다는 판단도 작용했다.

이로써 한미 금리차는 0.50–0.75%p로 좁혀졌다. 역전은 아직 해소되지 않았지만, 물길의 기울기는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대가는 남는다. 2026년 2분기 말 가계신용 잔액은 2,019.8조 원으로 전 분기보다 25.9조 원 늘었다. 이 규모의 부채 위에서 금리를 올린다는 것은, 수백만 가구의 가처분소득을 직접 깎는다는 뜻이다. 취약차주에게 이것은 통계가 아니라 생계의 문제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 글 전체의 딜레마와 마주한다. 금리를 누르면 자본이 유출되고 자산 거품이 자라고, 금리를 올리면 부채를 진 사람들이 무너진다. 중앙은행에게 좋은 선택지는 없다. 있는 것은 언제 비용을 치를 것인가에 대한 선택뿐이다.

한은의 판단은 '지금 조금'이 '나중에 많이'보다 낫다는 것이다. 8·3 조치가, IMF 이후의 규제 폐지가, 그리고 30년간의 일본이 각각 증명한 것도 결국 같은 명제다. 미룬 대가는 사라지지 않고 이자를 붙여 돌아온다.


15. 마무리하며, 시간은 누구의 것인가?

이자의 역사는 시장과 규제 사이의 영원한 줄타기였다. 그러나 더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시간의 가격을 조작하려 한 권력들의 기록이다.

중세 교회는 이자를 금지했고, 그 결과 이자는 '선물'이라는 이름으로 장부 속에 숨었으며, 숨은 채권은 왕에게 떼어먹혔다. 필리프 4세는 채권자를 추방했고, 에드워드 3세는 장부를 재감사해 채무를 깎았으며, 펠리페 2세는 네 번 파산하고도 왕좌를 지켰다. 대가를 치른 것은 언제나 왕이 아니라 바르디였고 페루치였고 푸거였고, 이름조차 남지 않은 궁정 유대인들이었다.

1972년 한국 정부는 사채 계약을 무효화했고, 1998년에는 이자 상한을 폐지했다가 서민 금융이 무너지자 되살렸다. 2008년 연준은 이자를 0으로 만들었고, 일본은행은 그것을 마이너스까지 밀어붙인 뒤 30년 만에 되돌리는 중이다. 그 되돌림이 지금 도쿄의 국채시장을 흔들고, 워싱턴의 조달비용을 밀어올리고, 서울의 외국인 수급을 바꾸고 있다.

시장의 개입은 단기적으로 효과적이지만, 중장기적으로 리스크가 크다. 1970년대 명동의 연 46%, IMF 직후의 수백 % 사채, 20% 상한 아래에서 자라난 불법 사금융, 0금리가 키운 자산 거품, 그리고 이제 시작된 정상화의 진통까지 — 이 모든 것은 같은 명제의 다른 판본이다. 물길은 막을 수 있지만 없앨 수는 없다. 막힌 물은 어딘가에서 더 높이 차오른다.

이자의 역사는 결국 시간은 누구의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돌아온다. 중세 신학자들은 시간이 신의 것이므로 인간이 그것을 팔 수 없다고 했다. 현대의 우리는 시간을 초 단위로 할인해 가격을 매긴다. 그리고 그 사이 어딘가에서, 중앙은행은 시간의 가격을 결정하는 권한을 신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처럼 행사한다.

금리는 단순한 숫자가 아니다. 그것은 문명의 선택이고, 가치관의 충돌이며, 결국 누가 미래의 비용을 지불할 것인가에 대한 결정이다. 왕이 갚지 않았을 때 은행이 망했고, 은행이 망했을 때 예금자가 잃었다. 오늘 금리를 누르면 내일 누군가가 갚는다.

그 청구서는 언제나 도착한다. 다만 수취인의 이름이 바뀔 뿐이다.


본문의 2026년 8월 기준 시장 데이터는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 발표, 일본 채권시장 및 미 연준 자료를 참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