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로스 곤, 닛산 로고 앞 — 일본 사법·엔자이 칼럼 썸네일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이야기, 악기 상자 속의 남자.

2019년 12월 29일, 도쿄 미나토구의 한 주택에서 남자 하나가 걸어 나왔다. 감시 카메라는 그가 혼자 나가는 장면을 찍었다. 이 남자는 신칸센을 타고 오사카로 갔고, 호텔 방에서 대형 음향장비 상자 안에 몸을 구겨 넣었다. 간사이 국제공항의 프라이빗 제트 터미널에서는 대형 화물을 X선 검사대에 올리지 않았다. 상자는 봄바디어 글로벌 익스프레스에 실렸고, 이스탄불을 경유해 이튿날 베이루트에 도착했다.

상자 속 남자는 한 때 닛산의 구원자라고 불렸던 닛산·르노·미쓰비시 얼라이언스의 회장이었던 카를로스 곤이다. 그는 보석금 15억 엔을 포기하고, 경찰 출신 미국인 부자(父子)를 고용해, 인터폴 적색수배자가 되는 길을 스스로 택했다. 그가 베이루트에서 연 기자회견의 첫 문장은 대략 이랬다. "나는 정의로부터 도망친 것이 아니라, 불의와 정치적 박해로부터 탈출했다."

세계 자동차 산업의 정점에 있던 인물이 왜 밀항자가 되어야 했는가? 이 질문에 답하려면 일본 형사사법의 구조, 그리고 그 구조가 에도 시대부터 만들어내고 있는 단어 하나를 들여다봐야 한다.

엔자이(冤罪). 억울한 죄, 누명이다.


1. 카를로스 곤 사태의 시작

하네다에서 시작된 130일

2018년 11월 19일 저녁, 곤을 태운 전용기가 하네다에 착륙했다. 도쿄지검 특수부 검사들이 기내로 올라왔다. 혐의는 금융상품거래법 위반, 유가증권보고서에 자신의 보수를 실제보다 수십억 엔 적게 기재했다는 것이었다. 같은 날 미국인 임원 그레그 켈리도 체포됐다. 그날 밤 닛산의 사이카와 히로토 사장은 기자회견을 열어 곤의 "중대한 부정"을 발표했다. 재판은커녕 기소조차 되기 전이었다.

곤은 도쿄 고스게의 도쿄구치소에 수용됐다. 난방이 없는 독방, 하루 30분의 운동, 바닥에 깔린 다다미와 이불. 65세의 글로벌 CEO가 갑자기 변호사도 제대로 만날 수 없는 미결수가 됐다.

일본 형사소송법은 체포 후 최대 23일까지 구류를 허용한다. 하지만 검찰은 이 23일을 여러 번 쓰는 방법으로 무제한 구류를 집행한다. 방법은 간단하다. 혐의를 쪼개면 된다. 곤은 2015–2017년 보수 축소 기재로 첫 체포, 2018년분으로 12월 10일 두 번째 체포, 특별배임(리먼 쇼크 당시 개인 손실을 닛산에 떠넘겼다는 혐의)으로 12월 21일 세 번째 체포를 당했다. 한 사건이 끝나가면 다음 혐의로 다시 시계를 0으로 돌리는 방식이다. 이렇게 곤은 108일을 차가운 구치소에서 보냈다.

2019년 3월 6일, '면도날'이라 불리는 히로나카 준이치로 변호사가 합류한 뒤에야 보석이 겨우 허가됐다. 보석금 10억 엔. 곤은 작업복에 모자를 눌러쓴 변장 차림으로 구치소를 나왔다. 그리고 4월 4일, 검찰은 그를 네 번째로 체포했다. 오만 판매대리점을 통한 회삿돈 유용 혐의였다. 보석 중이던 피고인을 새 혐의로 다시 잡아넣는 것은 일본에서 드문 일이 아니다. 4월 25일, 두 번째 보석. 보석금 5억 엔.

보석의 조건

두 번째 보석 조건은 이랬다. 자택 현관에 감시 카메라 설치. 인터넷은 변호사 사무실에서만. 휴대전화는 통화 기록이 제출되는 1대만. 해외 출국 금지. 그리고 아내 캐롤과의 접촉 금지. 부부는 법원 허가 없이 만날 수도, 전화할 수도 없었다. 곤 측이 낸 접촉 허가 신청은 거듭 기각됐다. 검찰은 아내가 증거인멸에 관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첫 재판 기일은 2020년 4월로 잡혀 있었다. 그마저도 혐의 일부에 대한 것이었고, 변호인단은 전체 재판이 끝나는 데 수년이 걸릴 것으로 봤다. 곤이 악기 상자에 들어가기로 결심한 것은 그 시점이다.

탈주 이후

탈주를 도운 마이클 테일러(전 미 육군 그린베레)와 아들 피터 테일러는 2021년 미국에서 일본으로 인도돼 각각 징역 2년, 1년 8개월을 선고받았다. 드라마틱한 탈주를 한 곤 본인은 레바논에 있다. 레바논은 자국민을 외국의 어느 나라와도 인도하지 않는다.

그리고 남은 사람이 있다. 그레그 켈리다. 그는 도망치지 않고 재판을 받았다. 2022년 3월, 도쿄지방재판소는 켈리에게 적용된 8개 연도 혐의 중 7개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유죄는 마지막 1개 연도뿐이었고, 그마저 집행유예였다. 검찰이 "명백한 범죄"라며 공항에서 사람을 끌어내렸던 사건의 실체가 이 정도였다. 켈리는 무죄 판결을 받기까지 3년 4개월 동안 일본을 떠나지 못했다.


2. 변호사 없는 취조실

일본의 취조실에는 변호사가 없다. 이것이 핵심이다.

미국 드라마에서 익숙한 장면에서 늘 용의자가 "변호사를 부르겠다"고 하면 심문이 중단되는 것은 일본에서 통하지 않는다. 일본 형사소송법은 피의자의 변호인 접견권은 보장하지만, 취조 중 변호인의 입회권은 보장하지 않는다. 변호사는 취조가 끝난 뒤 접견실에서 만날 수 있을 뿐이다. 그것도 접견 금지 처분이 붙으면 변호인 외에는 아무도 만날 수 없다.

곤은 하루 최대 8시간까지 검사의 신문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크리스마스에도, 새해에도 신문은 계속됐다. 그의 곁에는 통역사만 있었다. 검사는 물었다. "인정하면 이 모든 것이 빨리 끝난다. 곤은 후일 이 말을 인정하지 않으면 끝나지 않는다"는 뜻으로 이해했다고 했다.

일본은 2019년 6월부터 재판원 재판 대상 사건과 검찰 독자 수사 사건에 한해 취조 전 과정의 녹음·녹화를 의무화했다. 곤 사건은 특수부 사건이었으므로 녹화 대상이었다. 하지만 녹화는 취조 자체를 막지 못한다. 변호인 없이, 하루 여덟 시간씩, 몇 주에 걸쳐 같은 질문을 반복하는 것은 카메라가 있어도 합법이다. 그리고 그 변호사 입회도 없이 취조에서 만들어진 조서가 법정에서 결정적 증거가 된다.


3. 자백할 때까지 끝까지 한다 - '인질사법'의 구조

일본 변호사들이 '인질사법(人質司法)'이라 부르는 것은 하나의 법 조항이 아니라 여러 제도가 맞물려 돌아가는 사업 병폐를 카를로스 곤을 겪었다.

첫째, 23일의 구류. 체포 후 48시간 안에 검찰 송치, 24시간 안에 구류 청구, 10일 구류, 추가 10일 연장. 합쳐서 23일. 이 기간 동안 피의자는 경찰서 유치장이나 구치소에 있었다.

둘째, 재체포. 혐의를 나누면 23일이 46일, 69일, 92일이 된다. 곤은 네 번 체포됐다. 이것이 "무제한 구류"라 불리는 이유다. 법률상 상한은 있지만 실무상 상한은 없다.

셋째, 기소 후 구류와 보석 기각. 기소되면 피고인 신분이 되지만 구류는 계속된다. 보석 신청의 관문은 하나다. 혐의를 인정하는가? 혐의를 부인하거나 묵비하는 피고인은 "증거인멸 우려"를 이유로 보석이 기각된다. 인정하면 나갈 수 있고, 부인하면 나갈 수 없다. 이것이 인질사법이 피고인을 지치게 하는 방법이다.

곤 사태 이후 등장한 또 하나의 사례가 있다. 2020년, 요코하마의 중소기업 오카와라 화공기(大川原化工機)의 사장과 임원 3명이 경시청 공안부에 체포됐다. 이들이 만드는 분무건조기가 생물무기 제조에 전용될 수 있는 수출규제 품목인데 무허가로 수출했다는 혐의였다. 세 사람은 11개월 동안 구류됐다. 그 중 한 명인 아이자와 시즈오 고문은 구류 중 위암이 발견됐으나 보석이 기각됐고, 2021년 2월 사망했다. 그해 7월, 도쿄지검은 첫 공판 나흘 전에 공소를 취소했다. 애초에 규제 대상이 아니었다는 내부 판단이 수사 단계에서 이미 있었다는 사실이 경시청 내부고발로 드러났다. 2023년 도쿄지방재판소는 체포와 기소가 위법이었다고 판결했다.

곤은 "회장이라서" 당한 것이 아니다. 시내 중소기업 사장도, 네팔인 노동자도, 시골 된장공장 직원도 똑같이 당한다. 곤 사건이 특별한 것은 세계가 지켜봤다는 점뿐이다.


4. 기소되면 99.9% 유죄인 나라

일본의 형사재판 유죄율은 99% 이상이다. 한때 99.9%에 달했고, 지금도 99.8–99.9% 수준을 오간다. 게임 《페르소나 5》에서 검사 캐릭터가 "일본의 1심 유죄율은 세계 최고인 99.9%야. 기소당하면 피고에게는 승산이 없는 거나 다름없어"라고 대사를 치는 것은 과장이 아니다. 《역전재판》 시리즈에 40년간 무패인 검사가 등장하는 것도 풍자다.

이 수치를 옹호하는 논리도 있다. 일본 검찰의 이른바 '정밀사법(精密司法)'이다. 검찰은 수사 단계에서 실체적 진실을 철저히 규명하고, 유죄가 확실한 사건만 기소한다. 실제로 일본 검찰의 기소율은 30%대에 불과하다. 송치된 사건의 3분의 2는 불기소 또는 기소유예다. 따라서 유죄율 99.9%는 법원이 무자비해서가 아니라 검찰이 신중해서라는 것이 법무성의 공식 반박이다.

이 논리에는 절반의 진실이 있다. 미국이나 영국은 기소율이 70%대이고 무죄율이 20%대다. 기소법정주의를 채택한 독일도 무죄율이 20%를 넘는다. 이들 나라와 일본의 유죄율을 단순 비교하는 것은 분모가 다른 분수를 비교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나머지 절반은 이렇다. 정밀사법이 정말로 작동한다면, 검찰이 기소한 사건이 법정에서 무죄가 나는 일은 '실수'가 된다. 그리고 관료조직에서 실수는 개인의 인사 불이익과 조직의 위신 추락을 의미한다. 그래서 검찰은 일단 기소하면 유죄를 받아내기 위해 모든 것을 한다. 법원은 수사기관이 작성한 조서를 법정 진술보다 신뢰한다. 피고인이 "그 자백은 강요된 것"이라고 말해도, 재판부는 취조실에서 작성된 문서 쪽을 믿는다.

그 결과 일본에서 형사재판은 유무죄를 다투는 곳이 아니라 이미 정해진 결론을 확인하는 곳이 됐다. 곤이 "일본에서 공정한 재판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근거는 이 숫자였다. 켈리가 대부분 무죄를 받았다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검찰의 기소가 얼마나 무리했는지를 보여준다. 정밀사법의 나라에서 7/8이 무죄인 기소가 나왔다.

참고로, 한국의 유죄율도 99% 안팎이다. 한국 독자가 이 글을 남의 나라 이야기로만 읽어서는 안 되는 이유다.


5. 엔자이의 계보

일본이 '엔자이의 나라'라 불리는 것은 곤 한 사람 때문이 아니다. 수십 년에 걸쳐 쌓인 사건들 때문이다.

하카마다 사건 (1966). 프로복서 출신 하카마다 이와오는 자신이 일하던 시즈오카현 된장회사 전무 일가 4명을 살해하고 방화한 혐의로 체포됐다. 취조는 20일 넘게, 하루 12시간 이상 이어졌다. 그는 자백했다가 법정에서 번복했다. 사건 1년 2개월 뒤 된장통에서 "발견된" 혈흔 묻은 옷 5벌이 결정적 증거가 됐다. 옷은 그의 몸에 맞지 않았고, 훗날 DNA도 일치하지 않았다. 1980년 사형 확정. 2014년 시즈오카지방재판소가 재심 개시와 석방을 결정했지만 검찰의 항고로 재심은 4년 뒤 취소됐고, 최고재판소를 거쳐 다시 시작됐다. 2024년 9월 26일, 무죄. 재판부는 옷의 혈흔이 수사기관에 의해 날조됐다고 판단했다. 검찰은 항소를 포기했다. 그는 47년을 사형수로 살았고, 세계 최장기 사형수 기록을 남겼다. 무죄 판결 당시 88세였고, 장기 구금으로 인한 정신적 손상은 회복되지 않았다.

아시카가 사건 (1990). 도치기현 아시카가시에서 4세 여아가 살해됐다. 유치원 통학버스 운전기사 스가야 토시카즈가 초기 DNA 감정을 근거로 체포됐고, 자백했다. 2000년 무기징역 확정. 2009년 재감정에서 DNA가 일치하지 않는 것으로 드러나 석방, 2010년 재심 무죄. 17년 반의 옥살이였다. 피해자 유족조차 그가 범인이 아니라고 믿었다. 그의 아버지는 유죄 판결의 충격으로 사망했고, 어머니는 출소 2년 전 세상을 떠났다.

사야마 사건 (1963). 사이타마현 사야마시에서 여고생이 납치·살해됐다. 부라쿠민 출신 청년 이시카와 카즈오가 체포됐다. 물증은 빈약했고, 자백은 취조 과정에서 나왔다. 그는 무기징역을 살고 1994년 가석방됐지만 아직도 무죄를 주장하며 재심을 청구하고 있다. 60년 넘게 이어진 싸움이다.

나바리 독포도주 사건 (1961). 미에현 나바리시의 마을 모임에서 농약이 섞인 포도주를 마신 여성 5명이 사망했다. 오쿠니시 마사루는 자백 후 번복했고, 1심 무죄, 2심 사형, 최고재판소 확정. 그는 53년간 사형수로 복역하며 재심을 7차례 청구했으나 모두 기각됐고, 2015년 89세로 옥중 사망했다.

도쿄전력 여직원 살인사건 (1997). 도쿄전력 엘리트 사원이 시부야에서 살해됐다. 네팔인 노동자 고빈다 프라사드 마이나리가 체포됐다. 1심은 무죄였다. 검찰이 항소했고, 도쿄고등재판소는 그를 보석하지 않은 채 재판을 진행해 유죄로 뒤집었다. 2012년 재심에서 현장의 DNA가 제3자의 것으로 확인돼 무죄. 15년의 구금이었다.

오카와라 화공기 사건 (2020). 위에서 설명했다. 이 사건은 곤 사건과 동시대에, 경제사범 영역에서, 똑같은 인질사법이 작동했음을 보여준다.

이 목록에서 반복되는 패턴은 명확하다. 장기 구류, 변호인 없는 취조, 자백, 법정에서의 번복, 그리고 조서를 믿는 법원. 그리고 무죄를 받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17년, 47년, 53년이다.


6. 왜 이렇게 되었는가? - 메이지 이전부터 GHQ까지

에도 시대 일본의 형사 절차에서 고문은 공식 수사 방법이었다. 자백이 없으면 유죄 판결을 내릴 수 없다는 원칙이 있었고, 그래서 자백을 받아내기 위한 고문이 정당화됐다. 자백은 '진실의 증거'였고, 고문은 그 진실에 도달하는 합법적 수단이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서구식 법제가 들어오면서 고문은 1879년 공식 폐지됐다. 하지만 자백 중심주의는 사라지지 않았다. 법은 바뀌었지만 수사관의 의식은 바뀌지 않았다. 다이쇼·쇼와 시대의 특별고등경찰은 사상범에게 자백을 받아내는 기관이었고, 1910년 고토쿠 사건에서는 사회주의자 26명이 대역죄로 체포돼 12명이 처형됐다. 훗날 유족이 재심을 청구했을 때 법원은 대역죄 조항이 폐지됐으니 심판할 수 없다며 면소했다.

패전 후 GHQ는 일본국 헌법에 고문 금지(제36조), 자백 강요 금지와 자백만으로는 유죄 불가(제38조)를 명문화했다. 그러나 헌법이 취조실의 관행을 바꾸지는 못했다. 헌법 38조는 "강제, 고문, 협박에 의한 자백 또는 부당하게 긴 억류·구금 후의 자백"을 증거로 쓸 수 없다고 규정한다. 곤이 108일, 하카마다가 47년 구금된 나라의 헌법이다. 조문과 현실의 거리가 곧 엔자이의 민낮이다.


7. 카를로스 곤은 옳은 선택을 했을까?

이 질문에는 두 개의 시선이 있다.

법적으로는 명백히 틀렸다. 그는 보석 조건을 위반하고 출국관리법을 어겼으며, 이는 일본 형법상 범죄다. 그를 도운 테일러 부자는 실형을 살았다. 그는 원래 혐의에 더해 새로운 범죄를 추가한 셈이고, 그 결과 영원히 "도망친 사람"이 됐다. 원래 혐의에 대한 무죄를 주장할 법정을 그 스스로 포기했다.

합리적 행위자의 선택으로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가 마주한 선택지를 정리해보자.

  • 잔류: 재판은 수년이 걸린다. 그동안 아내를 만날 수 없다. 유죄율은 99.9%다. 유죄가 나면 최대 15년형이다. 65세인 그에게는 남은 생의 대부분이다. 켈리처럼 대부분 무죄를 받을 가능성도 있었지만, 켈리조차 유죄 하나는 붙었고 3년 4개월을 일본에 묶여 있었다.
  • 탈주: 보석금 15억 엔을 잃는다. 국제 수배자가 된다. 일본과 인도조약이 있는 나라에는 갈 수 없다. 대신 레바논에서 자유롭게 살고, 자신이 겪은 억울한 일본 사법 시스템의 서사를 직접 말할 수 있다.

기대값 계산은 어렵지 않다. 곤은 스타 경영자이며 재무를 다루던 사람이다.

문제는 이 선택이 "옳은가가 아니라, 이런 선택이 합리적이 되는 사법 시스템이 정상인가?"다. 무죄를 주장하는 피고인이 정당한 재판보다 밀항을 택하는 것이 기대값상 우월하다면, 그 시스템은 이미 실패한 것이다. 곤의 탈주는 일본 사법을 향한 국제사회의 신뢰 투표였고, 결과는 불신이었다.

그가 도망친 뒤에도 남은 것이 있다. 켈리의 무죄 판결, 오카와라 화공기 사건의 위법 판결, 하카마다의 무죄 확정, 그리고 인질사법 위헌소송. 곤은 재판정에서 싸우지 않았지만, 그의 탈주가 만든 국제적 주목이 없었다면 이 사건들이 지금처럼 조명됐을지는 알 수 없다.


8. 변화는 오고 있는가?

2026년, 일본 국회는 재심 절차에 관한 형사소송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재심 청구 단계에서 법원이 검찰에 증거 제출을 명령할 수 있는 제도, 그리고 재심 개시 결정에 대한 검찰의 불복 신청을 원칙적으로 금지하는 내용이 담겼다. 하카마다 사건에서 재심 개시가 검찰 항고로 4년 취소됐다가 최고재판소를 거쳐 10년 만에 열린 일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일본변호사연합회는 이를 "전진"으로 평가하면서도, 엔자이를 사후에 구제하는 것보다 미연에 막는 것이 먼저라고 했다. 전 사건·전 과정 녹음녹화, 묵비 의사를 밝힌 피의자에 대한 취조 제한, 변호인의 취조 입회권, 체포 단계부터의 국선변호, 폭넓은 증거 개시, 그리고 인질사법으로 불리는 신병 구속 관행의 개혁. 이 목록은 그대로 곤 사건에서 문제가 됐던 것들이다.

인질사법에 대해서는 2024년 가도카와 쓰구히코 전 회장(도쿄올림픽 뇌물 사건, 226일 구류)이 국가를 상대로 위헌소송을 제기했다. 하카마다 재심을 결정했던 전직 판사가 변호를 맡고 있다. 국가 측은 첫 답변에서 "인질사법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맺으며, 악기 상자에서 나온 뒤

곤은 지금도 베이루트에 있다. 인터폴 적색수배는 유효하고, 그는 레바논을 떠날 수 없다. 어떤 의미에서 그는 더 큰 구치소로 옮겨간 셈이다.

하카마다는 시즈오카의 집에서 누나 히데코와 산다. 그는 무죄 판결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47년의 사형수 생활이 그의 정신에 남긴 것은 무죄 판결로 되돌릴 수 없다.

오카와라 화공기의 아이자와 고문은 무죄를 보지 못하고 죽었다. 나바리 사건의 오쿠니시도, 제국은행 사건의 히라사와도 감옥에서 죽었다.

일본 사법의 엔자이는 고문의 시대에서 시작돼 무제한 구류의 시대로 이어진 긴 그림자다. 고문은 사라졌지만, 사람을 가둬두고 변호사 입회 없이 고립시키며 자백할 때까지 기다리는 구조는 살아 있다. 곤은 그 폭력적인 일본 사법 시스템에서 상자에 숨어 도망쳤다. 그러나 도망칠 수 없는 사람들이 여전히 그 안에 있다.

일본이 진정으로 답해야 할 질문은 "곤이 왜 도망쳤는가"가 아니다. "왜 도망치는 것이 합리적인 나라가 되었는가"다.


참고: 하카마다 사건 재심 무죄(2024.9), 오카와라 화공기 국가배상 판결(2023.12), 그레그 켈리 1심 판결(2022.3), 재심법 개정 및 일본변호사연합회 회장 성명(2026.6–7), 가도카와 인질사법 위헌소송(2024–), 나무위키 '엔자이' 항목 및 일본변호사연합회 자료.